
더프리뷰 서울 2025 외부 전경 (사진: 박예린)
2025년 더프리뷰 서울이 올해로 다섯 번째 회차를 맞았다. 특히 ‘변화’와 ‘새로움’을 주요 키워드로 내세운 올해 더프리뷰에서는 한남과 성수에서 열렸던 지난 회차와 달리 서울역 근처 옛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간 특성을 적극 활용한 행사 구성이 돋보였다. 올해 참여한 곳은 총 40개 갤러리의 약 175명의 작가다. 갤러리별 부스 외에도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무대, 영상 스크리닝, 스페셜 부스 구성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처럼 더프리뷰 서울 2025는 명확한 기획의도와 형식적 실험을 통해 잠시 머무는 감각들을 생성하며, 아트페어의 전형적 흐름을 벗어난 감응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좌) 더프리뷰 서울 2025 설치 전경 (사진: 박예린)
(우) 더프리뷰 서울 2025 Film 섹션 전경 (사진 제공: 캡션 서울)
■ 주목할 큐레이션
올해 더프리뷰 서울에는 오브제후드, 레이블갤러리, 옵스큐라 등 익숙한 이름부터 캡션 서울, 에이피오프로젝트 등 비교적 새로운 공간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갤러리들이 참여했다. 그 중에서도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데서 나아가 명확한 전시 기획 의도와 그에 상응하는 작품 간의 긴밀한 연결을 보여주는 갤러리들이 두드러졌다. 이들 부스는 참여 작가들의 작업 세계를 하나의 유기적 서사나 감각의 흐름 안에 배치함으로써, 관람자에게 보다 밀도 있는 시각적 경험을 선사했다. 일례로, 예술공간 의식주는 플랫하고 섬세한 붓질을 통해 신체의 연약한 부분과 미세한 감각, 감정의 파편을 흩뿌리는 여섯 작가의 작업을 부스 전반에 걸쳐 소개했다. 주로 소품 위주로 구성된 큐레이션은 조용한 긴장과 밀도의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예컨대, 박진주 작가의 회화는 손가락 말단을 클로즈업한 이미지의 캔버스 가장자리에 마치 반창고를 연상케 하는 아이보리색 종이테이프가 부착되어 있었고, 수연 작가의 작품은 방금 막 모눈종이에서 그려 걸어 둔 듯 가볍고 섬세한 질감을 구현했다. 이들 갤러리가 제시한 주제의식과 형식적 전략은 아트페어와 부스라는 제한된 시공간적 조건에서도 전시로서의 완결성과 고유한 리듬을 확보하고 있었다.

카다로그 부스 전경 (사진 제공: 카다로그)
카다로그에서는 이동근, 하슬기, 임성빈, 임하은, 이서연 등 다섯 명의 작가가 참여한 가운데, 감각과 시각적 재현 사이의 어긋남, 이미지와 사물의 간극을 탐색하는 작업들을 소개했다. 각 작가의 조형 언어는 상이했지만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인식의 지점이라는 공통점을 매개로, 하나의 공간 안에 유기적인 리듬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임성빈 작가는 나뭇잎이나 식물 이미지 등을 사실적인 사진으로 촬영한 뒤, 이를 직육면체 상자 같은 인위적인 구조로 접어낸 조각 작업을 선보였고, 임하은 작가는 나뭇가지, 모래알, 자갈 등의 자연물이 마치 정물화와 같이 배열되는 순간을 포착해 회화로 옮겼다. 한편 하슬기 작가는 축축함, 시큼함 같은 감각적 체험을 추상적이고 촉각적인 조각으로 재현하며 감각과 재현의 관계를 질문한다. 이동근 작가는 임시 거주 공간인 텐트 구조와 기워진 천의 형상을 참조하여, 도시를 감각하는 지리적 경험을 설치 작업으로 풀어냈다. 특히 야외 공간을 점유하는 그의 작업은 붉은 건물 외벽과 묘하게 어우러졌다.

이동근, 카다로그 (사진 제공: 카다로그)
이와 더불어 카다로그 부스에서는 관람자 참여형 프로그램 <프레카리오 시티(Precario City)>가 운영되었다. 이 보드게임은 김다겸과 박노완이 결성한 팀 ‘프레카리아트’의 협업 작업으로, 저임금·저숙련 불안정 노동 계급을 의미하는 신조어 프레카리아트(Precariat) 개념을 반영해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프레카리아트로 살아가는 예술가의 생존 전략과 작업의 지속 가능성을 다룬다. 문명 붕괴 이후 예술이 중심이 된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플레이어는 예술가가 되어 작업을 제작하고 전시하며, 거래와 비평, 질병과 감정 상태 같은 현실적 요소를 전략과 우연을 통해 조율해 나가야 한다. 최대 4인의 플레이어가 마스터와 함께 참여하는 이 게임은 유희적인 방식으로 실제 예술가의 삶을 시뮬레이션하는 실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전혀 즐겁지 않은 삶 그 자체였을 지도 모른다. 유독 이 부스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는 이 게임이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 불안정한 현실을 살아가는 예술가의 삶의 감각에 묘하게 접속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프레카리아트, <프레카리오 시티>, 카다로그 (사진 제공: 카다로그)
2023년부터 종로구에서 운영중인 포에버 갤러리는 작가이자 교육자인 최태윤이 설립한 현대미술 공간으로, 현대미술의 지속가능성과 다양성, 그리고 접근성의 실천을 핵심 원칙으로 삼는다. 특히 서울의 수많은 대안공간 및 갤러리 중 휠체어 사용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에 주목해 장애인 접근성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점이 특징적인 공간이다. 포에버는 관용, 환대, 공동 번영의 가치를 실천하며, 기성 작가와 신진 작가, 순수예술과 실험예술, 디자인과 공예, 공연예술과 교육,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지우고, 그 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예술적으로 실험하는 데 주력한다.

포에버갤러리 부스 전경 (사진: 박예린)
포에버갤러리는 이번 더프리뷰 서울에서 작가 민과 이요를 소개한다. 민은 젠더, 무성애 정체성, 관계의 감정 구조를 회화와 설치로 풀어낸다. 전반적으로 민의 작업은 ‘연대하지 못하는 존재’에서 출발하여, 비규범적 감정 구조를 시각화하고, 정동적 상상력을 통해 타자성과의 공존 방식과 타자들 간의 ‘낯선 공감’의 가능성을 상기시킨다. 부스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대형 작품 〈퍼레이드〉는 형광천, 퍼포먼스 의상, 조각 텍스트 등으로 구성된 행진 형식의 설치 작업이다. 민은 이 작품에서 '비(非)연대적 집단성'이라는 아이러니한 키워드를 중심에 놓는다. ‘함께 걷는다’는 퍼레이드의 형식을 차용하면서도, 이질적인 형형색색의 인물 형태는 그것이 모종의 목적이나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는 이질적 존재들의 임시적이고 불협의 집합임을 드러낸다.

민, 포에버갤러리 (사진: 박예린)
부스 안쪽에는 작가가 직접 제작한 벽화를 중심으로, 감정과 관계의 역동성을 담은 회화 및 설치작업들이 이어졌다. 민 작가의 〈실뜨기〉와 〈인형놀이〉는 각각 유년기의 놀이를 모티프로 삼아, 연대와 친밀성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시도한다. 〈실뜨기〉는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는 협동 놀이로, ‘함께함’이라는 개념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규정되어 왔는지를 탐색한다. 작가는 이 놀이가 전제하는 규칙성과 호흡의 동기화를 통해, 유성애 중심의 연대 서사에서 배제된 존재들의 위치를 가시화한다. 반면, 〈인형놀이〉는 타인의 감정을 흉내내고 역할을 학습하는 사회화의 구조를 드러내며, 인형은 발화하지 않지만 감정을 투사당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작품은 감정의 강요와 사랑에 대한 사회적 규범이 개인의 감각을 어떻게 지우는지를 묻는다.1

요이, <내가 헤엄치는 이유>, 2023, 2-채널 영상, 스테레오 사운드 설치, 포에버갤러리 (사진: 박예린)
물과 여성의 신체 경험을 교차시키는 작업을 지속해온 요이(Yo-E Ryou)는 뉴욕에서의 활동과 번아웃을 거쳐 제주로 이주한 이후, 해녀학교 등록과 지역 공동체와의 교류를 통해 물리적‧문화적 경계를 넘는 감각적 언어를 발견해왔다. 시각예술과 디자인을 공부한 작가는 영상, 사운드, 텍스트, 퍼포먼스를 결합해 언어 이전의 감정과 기억을 섬세하게 조직하며, 삶과 예술, 리서치를 유기적으로 엮는 실천을 이어간다.

요이, 〈말하는 물, 쓰는 몸>, 2025, 혼합재료, 59.4 × 84.4 cm, 포에버갤러리 (사진: 박예린)
〈내가 헤엄치는 이유(Why I Swim)〉(2023)는 제주에서 수영을 다시 배우는 과정을 따라가며 자기 회복의 감각을 담은 시적 영상 에세이다. 반복적으로 물에 들어가고, 숨을 쉬고, 몸을 띄우는 행위들은 감정적으로 ‘잠겨 있던’ 과거를 천천히 해체하고 새롭게 발화하는 과정이 된다. 이 작업은 하나의 편지처럼 구성되며, 수중 촬영과 바람 소리, 내레이션과 텍스트가 얽혀 침묵과 고백, 신체와 언어의 경계를 부드럽게 흐린다. 특히 영상과 연계된 리딩 퍼포먼스는 신체적 경험을 언어로 재구성하는 과정 자체를 퍼포먼스화함으로써, 관람자에게 물리적 감각과 서사적 몰입을 동시에 제안하는 더프리뷰의 Spotlight로 주목받았다. 더프리뷰에서는 영상 작업과 함께 드로잉 작업 〈말하는 물, 쓰는 몸〉(2025)을 선보이며, 물과 글쓰기의 유비적 관계를 감각적으로 풀어낸다.2
드로잉룸은 밈모와 이해반 작가의 작업을 중심으로, 종교와 전쟁, 접경지대의 풍경이라는 주제를 회화와 설치로 풀어냈다. 불확실성과 위기의 시대에 예술이 어떻게 시대적 감수성을 포착하고,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 응답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주제의식이 돋보였다. 밈모와 이해반은 전쟁의 위협과 (광기에 가까운) 종교적 열망, 접경지대의 생태적 유산과 정치적 긴장이 공존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시대적 조건을 조망한다.
이해반, 드로잉룸 (사진 제공: 드로잉룸)
이해반 작가는 지정학적 경계와 완충지대의 풍경을 회화로 재현하고, 전쟁과 평화, 충돌과 정지 사이의 서사적 긴장을 리서치, 스토리텔링, 풍경화 등의 방법으로 탐구한다. 이번 더 프리뷰 서울에 소개된 장면들은 정치적 구획과 무형의 긴장을 자연 풍경과 종교적 제의로 재현한다. 예컨대 〈배틀그라운드(Battleground)〉(2023)는 제례의 장소, 하늘로 비상하는 새, 무지개빛 창살, 그리고 신화적 생명력을 품은 자연에 대한 작가의 관심까지 전부 하나의 화면에 녹여낸 작업이다. 특히 이번에는 캔버스 뒤에 놓여져 마치 유령처럼 숨은 듯한 신발과 함께, 캔들이 꽂힌 조그마한 여성 누드 세라믹 조각 <Flower Lady>가 함께 디스플레이 되어 작품 전체에 일종의 제의적 분위기를 부여하였다. 발처럼 번져가는 곡선의 붓질과 보라, 남색, 연두, 황금빛이 혼재하는 이 색면들은, 문자 그대로 ‘전장’이라기보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불안, 폭발과 폭력, 그리고 무력한 수용의 상태와 같은 정서적 파장을 추상적 방식으로 감각화한다. 작품 중앙을 가로지르는 백색의 곡선은 마치 낙하하거나 상승하는 에너지의 궤적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춤추는 불꽃이나 영적 흔적처럼 화면을 감돈다. 이해반의 또 다른 출품작 〈Orange Zone〉(2022)은 경계와 안전, 그리고 자유의 조건을 보다 우회적으로 재현한다. 작품 제목이자 작품이 그 자체로 말하고 있는 ‘주황색 구역’은 가시성과 생존의 조건을 동시에 상징하는 시각적 경계선이다. 한편 화면 속에 드러나는 백조의 이미지는 작가가 삶과 죽음, 생태와 정치, 기억과 이동의 문제를 함께 포개어내고자 작가가 새와 관련된 다양한 리서치를 수행한 결과이기도 하다.3

밈모, 드로잉룸 (사진: 박예린)
밈모 작가는 오랜 시간 인류가 ‘염원’을 담아 전달해온 장치라는 점에서 성물(聖物)과 무기, 종교적 기호와 구조물의 혼성적 이미지를 통해 폭력성과 신성함, 수호와 파괴 간의 유사성과 복합적 층위를 다룬다. 이번 더프리뷰에서 작가의 출품작은 크게 두 방향의 실험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과거 종교건축에서 차용한 양식적 요소를 동시대의 시각적 기호들과 결합하여 조형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성스러운 것이 어떻게 이미지화되고 소비되는지를 비판적으로 탐색한다. 둘째는 전선, 레일, 조명과 같은 비건축적 장치들, 즉 건축적 공간 안에서 기능하지만 건축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들을 작업의 주요 구성 요소로 삼는다. 여기에 더해 작가는 응원봉, 안티드론건 등 저항과 대중문화의 물성을 끌어들여, 권위와 비판, 통제를 교차한다.
작가는 이번 더 프리뷰 서울에서 드로잉룸 섹션 외에도 Spotlight로 조명되어, 별도의 공간에서 개인 설치 작업 〈청야(Ruinenempfindsamkeit)〉를 선보였다. ‘폐허의 감응성’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이 전시는 건축이 단지 공간의 외형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능적 확장으로 기능해왔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건축이라는 개념을 더 이상 완결된 구조물로 보지 않고, 포스트휴먼 또는 논휴먼, 탈건축, 반건축 등 ‘건축 아닌 것들’의 담론으로 확장하며, 건축의 경계와 규범 자체를 해체하려는 시도를 이어간다.

밈모, 〈청야 (Ruinenempfindsamkeit)〉. 드로잉룸 (사진 제공: 드로잉룸)
그의 작품은 전파되고, 각인되고, 오해될 때 결국 맹목적 염원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종교와 전쟁이 공유하는 광기의 형태를 조형한다. 이는 총구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레일, 강철로 제작된 리브 볼트와 돔 등 고딕 종교건축 장식, 성경적 장면을 다루는 스테인드 글라스 대신 천사의 형태를 닮은 전투기가 그려진 창문 장식 등으로 형상화된다. 이로써 작품은 폭력과 신성, 파괴와 수호가 중첩되는 이 세계의 모순을 감각적으로 드러내고, 우리가 너무 멀어 손 닿지 않는 것, 그러나 반드시 닿아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응시를 요청한다.
■ 주목할 프로그램

(좌) 신관수, <Slider> (사진: 박예린)
(우) 박상호, <PLOT> (사진: 박예린)
한편, 올해에도 더 프리뷰 서울은 부스 전시 외에도 야외와 실내 공간을 유동적으로 활용한 Spotlight 전시와 퍼포먼스, 스크리닝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장면을 연출했다. 행사장에 들어서자마자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신관수 작가의 《Slider》였다. 샤워(SHOWER)가 소개한 이 작업은 놀이기구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목재 구조물로, 작가가 전시 디자인과 건축 현장에서 쌓아온 경험을 공간 조형으로 풀어낸다.
페이지룸8에서 선보인 박상호의 <PLOT> 시리즈 역시 주목을 끌었다. 문학적 서사를 기반으로 한 이 설치 작업은 회화적 패턴과 추상적 그래픽 요소를 조합해, 전시장의 잔디 공간과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이야기’와 ‘구조’를 연결하는 박상호 특유의 시선은 서울역으로 옮겨진 더프리뷰 서울의 전시 공간에 다채로운 서사성을 부여했다.

더프리뷰 서울 2025 퍼포먼스 섹션 전경 (사진 제공: 더프리뷰)
퍼포먼스 프로그램도 더 프리뷰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했다. d/p가 기획한 64J의 <목림삼(木林森)>은 신체를 에너지 단위로 환산하는 개념적 접근을 바탕으로, 사물과 움직임의 관계를 전복하는 공연이었다. 슬랙 와이어와 밸런스를 활용한 퍼포먼스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예술과 신체 사이의 경계를 새롭게 사유하게 했다. d/p가 소개하는 또 다른 퍼포먼스 <서커스게임즈>는 함서율과 이준상으로 구성된 서커스 디 랩(Circus D. Lab)이 선보였다. 이들은 저글링, 무대 오브제, 동작의 리서치를 바탕으로 서커스를 감각적 언어로 재구성하며, 더 프리뷰 서울의 복합적 공간성과 매체 간 접속 가능성을 실감하게 했다.
■ 주목할 작가
아트페어는 한정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수많은 작업들이 교차하는 장이다.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짧은 체류 시간 동안 서사의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작업은 드물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도 다음 소개하는 작가들은 이러한 전시 환경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자신만의 시각언어로 압축된 서사를 제안하는 핵심적인 작품으로 눈에 띄었다. 이들은 미감과 정제된 구조 그리고 형식의 밀도로, 하나의 전시된 작품을 넘어서 자신이 사유하고 구축해온 세계의 입구를 조용히 열어 보였다.
안주은 Jueun An / 정재열 Jae Youl Jeoung

오에이오에이 부스 전경 (사진 제공: 오에이오에이)
오에이오에이는 이번 더 프리뷰 서울에서 ‘Everyday Shift’를 주제로, 일상의 반복 속에서 문득 스쳐 지나가는 감각과 기억의 잔상을 회화, 드로잉, 설치 등 다양한 매체로 포착하는 작업들을 선보였다. 네 명의 작가가 참여한 이번 전시는 조용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삶의 장면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안주은과 정재열의 작업은 전시의 분위기와 방향을 동시에 이끌었다. 1999년생으로 올해 첫 개인전을 연 젊은 작가 안주은은 평범한 구조물과 도구에 스민 삶의 흔적에 주목해, 사물에 깃든 ‘살아가려는 의지’를 회화적으로 구현한다. 최근 개인전 《남을 것 What Remains》(2025)에서 선보인 작업들은 작물이 자라는 데 사용된 지지대나 비닐봉지, 기능을 다한 리어카 같은 대상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구조물은 대부분 쓰임을 다한 후 방치되거나 해체된 채 환경에 흡수되거나, 오염물로 남는다. 거센 바람이나 이글거리는 태양 등 극적인 환경이 설정된 캔버스 안 공간에서 인간의 쓰임에 따라 생과 사의 흐름이 결정되는 사물이 품은 생명력을 강조한다.

(좌) 안주은,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1)>, 2023, Water mixable oil on canvas 40.9×31.8cm, 오에이오에이 (사진 제공: 오에이오에이)
(우) 안주은,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0)>, 2023, Water mixable oil on canvas, 116.8×80.3cm, 오에이오에이 (사진 제공: 오에이오에이)

(좌) 정재열, <Preserved love story>, 2022, All purpose flour, salt ad water, 4.6 x 5 x 0.5 cm, 오에이오에이 (사진 제공: 오에이오에이)
(우) 정재열, <A glass of water>, 2025, Acrylic, pencil on paper 10x15cm (Frame 35.5x43.5cm), 오에이오에이 (사진 제공: 오에이오에이)
부스 한켠에는 조용하고 단정하게 정재열 작가의 설치 작업이 걸려 있었다. 정재열의 작업은 사소한 사물에 감정을 각인하는 섬세한 방식으로, 특정 장소나 순간에 각인된 기억의 흔적을 고정시킨다. 마치 누군가의 집에 놀러가서 오래된 먼지나 때묻은 낡은 커튼을 발견할 때처럼 그의 작업은 사적인 정서의 세밀한 감각을 자극한다. 이번 부스에서도 그는 작품과 액자 프레임 자체를 일종의 기억을 보관하는 장소로 다루며 관람자에게 자신의 기억과 사랑을 담아 보낸다. <Preserved love story>(2022)는 밀가루, 소금, 물로 구운 얇은 ‘쿠키’에 말 그대로 ‘영원한 사랑’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도록 밀봉한 작업으로, 과자처럼 바삭하고 연약해서 사라지기 쉬운 감정의 성질을 드러내는 동시에 애정어린 기억을 보존하는 시도이다. 거기에 새겨진 문장은 그 감정이 한때 존재했고, 여전히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낸다. 함께 전시된 <A glass of water>(2025)는 연필 드로잉과 동일한 모양으로 도려진 아크릴 자가 액자에 나란히 걸린 작품이다. 이 자는 실제로 작가가 제작한 사물로, 드로잉의 요소이자 물과 같이, 측정되지 않는 감정의 단위를 재는 상징적 도구로 기능한다. 표준화된 도구의 형태를 빌려오되, 그것이 담아내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사적이고 정서적인 대상이 된다.
김도빈 Dobin Kim

실린더 부스 전경 (사진 제공: 실린더)
실린더는 이번 더프리뷰에서 2000년생의 젊은 작가 김도빈의 작품을 단독으로 소개했다. 김도빈 작가는 보호와 폐쇄, 침투와 불안을 동시에 품은 공간으로서, 완결된 건축물이 아니라 반쯤 폐허가 되거나 쌓아 올리는 중인 ‘집’을 그려낸다. 작가의 작품에서 벽체와 나무 문짝, 바닥과 천장 등 공간의 경계를 짓는 건축적 요소들은 단단하고 수직적인 형태를 해체한 채 낡고 설은 자신의 몸들끼리 유동적으로 얽어들어간다.
<Two Nights>(2025)는 흙과 곰팡이, 벽돌과 노출된 골조가 그대로 드러나는 폐가의 실내를 배경으로 한다. 문이 없는 벽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시선은 열린 구조를 따라 안쪽으로 깊어지는 듯하지만, 앞면과 뒷면의 벽은 멀고 가까움을 구분하지 않은 채 서로 뒤얽혀 원근법적 질서를 흩트린다. 한편 〈Child Waving His Hand〉(2025)는 골동품 상자에서 꺼낸 듯한 장면으로, 즐거웠던 어느 날의 정원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불러온다. 작품 하단의 작은 상자에서 시작된 시선은 중앙의 창문을 거쳐, 상단부의 투명한 유리 너머로 손을 흔드는 아이에게 이른다. 그러나 아이의 얼굴은 이미 흐릿해졌고, 안뜰처럼 보이는 공간 또한 명확히 구획되지 않은 채 여러 시간층과 뒤섞인다. 이렇듯 김도빈 작가가 그려내는 주거 공간은 개인의 시간과 기억이 교차하고 스며드는 감각적 접촉의 장으로 재구성된다.

(좌) 김도빈, <Child Waving His Hand>, 2025, 캔버스에 유채, 130x90cm, 실린더 (사진: 박예린)
(우) 김도빈, <Two Nights>, 2025, 캔버스에 유채, 61x50cm, 실린더 (사진 제공: 실린더)
윤일권 Yoon Ilkwon / 황규민 Hwang Kyumin
2018년 망원동에 문을 연 이래 예술가 주도의 전시 실험을 지속해온 아티스트-런 스페이스 별관(OUTHOUSE)에서는, 이번 더프리뷰에서 《Tilt me Softly》라는 타이틀 아래 7인의 작가가 제안하는 ‘균형 밖의 감각’을 조명했다. 그 중 윤일권과 황규민의 작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울어짐을 감각하고 그것을 다시 그리는 회화적 방식을 제안한다.

(좌) 1) 윤일권, <돌덩어리>, 2025, Drypoint on plaster, 19x12x5cm. 2) 윤일권, <달리기>, 2025, Drypoint on plaster, 25x25x6cm, 별관 (사진: 박예린)
(우) 윤일권, <사라짐을 기억하기 위한 드로잉- 구령대>, 2024, Inking on engraved plates, 40x40cm, 별관 (사진: 박예린)
윤일권 작가는 흐릿하거나 어긋난 이미지, 멈칫하는 동작들을 통해 가속화된 세계와 일원화된 삶의 방향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하고, 현대인이 놓치고 있는 감각을 다시 돌아보도록 유도한다. 이번 출품작은 2024년 별관에서 열린 개인전에 선보였던 작업으로, 작가의 개인사와 깊이 연결된 백사마을의 풍경을 담고 있다. 그는 각인된 판 위에 잉크를 덧입히는 방식을 택해, 이미지를 선명하게 새기면서도 동시에 흐릿하게 지워내는 모순적인 인쇄 방식을 실험한다. 반투명하고 바랜 색감, 연약한 대비 속에서 디테일은 흐려지고 인상만이 남는다. 그 결과, 화면은 사라짐과 잔존이 겹쳐지는 기억의 모호한 지점을 감각적으로 재구성한다. 한편 작품에 새겨진 미세한 요철은 기억의 심상을 물질의 표면에 각인하려는 시도이자, 사라짐에 저항하지 않되 남아 있는 감각을 더듬고 포착하려는 작가의 회화적 방법론을 드러낸다. 이렇듯 작가는 사라져가는 장소를 기억하기 위한 방식으로, 물리적으로 소멸하는 공간과 정서적으로 남겨지는 장소 사이의 긴장을 다룬다.4

황규민, <화보18 - 박소현화보 - 부유하는 물덩이>, 2023, 한지에 목판 156x63.6cm (각 31.1x21.1cm), 별관 (사진: 박예린)
황규민 작가는 가상의 인물 ‘황씨(b.1874)’를 설정하여, 그가 동시대 서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상상하며 황씨의 학습을 위한 매뉴얼로서 화보(畵譜)를 제작한다. 이 화보, 즉 황규민의 작품 한 점 한 점은 각각 독립된 회화적 단위이자 특정한 배치로 모였을 때 하나의 거대한 화면을 이루는 모듈적 구조를 갖는다. 작가는 최근 자신의 회화만으로 구성하던 화보의 범위를 동시대 다른 작가의 작업까지 확장하여 제작하고 있으며, 화보의 형식과 배치 또한 변형과 조합의 실험을 이어 오고 있다. 이번에 소개된 두 점의 ‘박소현’ 화보는 그러한 시도로서, 황씨가 박소현의 수묵 작업을 관찰하고 해석하며 기록한 것처럼 제작된 작업이다. 작품은 분수와 물길을 주제로 작업해온 작가 박소현의 회화적 방식과 이미지 어휘를 참조하여 제작되었으며, ‘부유하는 물덩이’라는 제목 또한 원 작품명에서 차용한 것이다. 황씨의 시선을 빌려 동시대 서화를 탐색하는 이 회화적 시뮬레이션은, 전통적 양식과 현대적 표현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면서도 서화, 동양화, 동시대 서화 간의 연결 지점을 유희적으로 펼쳐 보인다.5
안진영 Jinyoung Ahn

피에스센터 부스 전경 (사진 제공: 피에스센터)
2024년 을지로 철공소 골목에 문을 연 피에스센터는 이번 더프리뷰에서 김채리, 박소라, 안수인, 안진영, 얀 톰자 오시에츠키(Jan Tomza-Osiecki), 허창범 등 6인의 작가를 소개하는데, 그 중에서도 안진영의 작업은 특히 주목할 만했다. 안진영 작가는 세상에 태어난 존재들의 의미와 쓰임을 사유하며, 자연의 미세한 리듬을 가늘고 반복적이면서도 밀도 높은 판화 드로잉으로 옮겨 온다. 바람, 비, 빛, 어둠 같은 자연 현상과 동식물의 생존 방식에서 영감을 받은 안진영의 작품은 생명의 섬세한 빛과 파동을 포착하려는 듯했다. 이번에 소개된 두 점의 작품은 나무 상자 안에 구성된 연극무대 같은 설치 형식으로, 판화 드로잉이 팝업처럼 입체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크지 않은 크기이지만, 얕고 깊음, 안과 밖, 앞과 뒤의 공간이 교차하는 이 무대의 입체적 구성과 시각적 밀도는 생명체 간의 관계에 대해 사유하는 조형적이면서도 시적인 풍경을 구성하기에는 충분한 크기로 보였다.

(좌) 안진영, <땅 위의 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 온 검은 그림자>, 피에스센터 (사진: 박예린)
(우) 안진영, <사람과 사람이 그리고 사랑이 가까워 질 때>, 피에스센터 (사진: 박예린)
이빈소연 Leebinsoyeon
미학관은 전시 기획과 아트 컨설팅, 교육, 출판, 아카이빙 등 다각적인 실천을 통해 동시대 예술의 다양한 층위를 탐색해 왔으며, 이번 더프리뷰 서울에서는 염지희, 이빈소연 등 5인의 작가가 참여했다. 이번 더프리뷰에 출품된 이빈소연 작가의 회화들은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발히 활동해온 작가의 이력이 반영된 디지털 회화로, 장식적이고 플랫한 스타일을 적극 활용하는 작가의 미감을 그대로 엿볼 수 있었다. 말, 리본, 손톱, 진주, 매니큐어 등 여성성을 환기하는 단편적 기호들이 화면 위에 배치되며, 이들은 장면 간 서사를 구성하기보다는 감정의 신호처럼 작동한다.

이빈소연, <집들이 선물>, 2024, Ink on PET(digital painting), paper panel, 102x82cm, 미학관 (사진: 박예린)
이빈소연은 여성의 욕망과 야망의 복잡한 역학이 미시적 일상 속에서 매 순간 작동한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진담과 농담’을 넘나드는 과장되고 허황된 정치적 서사를 구성한다. 이러한 서사는 현실과 허구를 쉼 없이 교차하고 겹치며, 여성 연대의 바깥에서 미끄러지는 존재들의 좌충우돌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이빈소연의 작업에서 사랑은 병리적 유머로, 욕망은 장식의 기호로, 연대는 어긋난 복제로 표현된다. 그 결과 감정은 연속적 서사로 수렴되지 못한 채 분절된 감각의 군집으로 해체된다. 그녀는 욕망의 대상화된 표면이 아니라, 그 표면을 구성하는 시선과 기호의 배열, 그리고 감정이 미끄러지며 파편화되는 찰나를 포착한다.6

(좌) 캡션서울 부스 전경 (사진 제공: 캡션서울)
(중) 홍장오, 옵스큐라 (사진 제공: 옵스큐라)
(우) 강나래, 레이블갤러리 (사진 제공: 레이블갤러리)
그 외에도 여러 갤러리들이 신선한 작가군과 매체 실험이 돋보이는 작업들을 선보였다. 캡션서울은 이용재, 정유진, 쉬저후이(Zehui Xu)의 회화와 설치를 통해 재현, 기억, 정체성의 구조를 탐색했으며, 레이블갤러리의 강나래 작가는 반복되는 가사노동을 단서로 삼아 주방세제와 뒤집개 같은 일상 오브제를 세라믹 조각과 오브제 설치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그 외 옵스큐라갤러리에서는 박치호, 정광민, 홍장오 등 중견작가들이 깊이 있고 실험적인 작업을 선보이며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더프리뷰 서울 2025에서는 다양한 작가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감각을, 표면 위에 잠시 머무는 장면들로 구체화했다. 짧지만 선명하게 시선을 붙드는 체류의 순간이 관람자의 시선 속에 조용히 남겨졌을 것이다.

더프리뷰 서울 2025 외부 전경 (사진: 박예린)
이렇게 2025년 더프리뷰 서울에 참여한 갤러리들과 작가들은 구획된 장르나 주제의 틀을 벗어나, 감각적 리듬과 서사의 중첩 속에서 작품을 통해 시대적 감수성을 드러냈으며, 관람자는 자신만의 호흡으로 그 감응의 파장을 경험했다. 더 프리뷰 서울은 이제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감각적 장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올해 전시에서는 강한 메시지나 선언보다는, 조용히 머물다 사라지는 감각의 단편들, 어긋난 관계들 속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공명, 그리고 각자의 리듬으로 잔상처럼 남는 감응의 서사가 인상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잠시 머무는 감각들’이라는 표현은, 올해 더 프리뷰 서울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언어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소비되지 않고도 머무를 수 있는 감각, 잠깐의 정지 속에서 발생하는 사유의 가능성에 대한 제안이었다.
Written by 박예린(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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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 작가 홈페이지: https://miin-yu.tistory.com/
2 요이 작가 홈페이지: https://www.yoeryou.com/
3 이해반 작가 홈페이지: https://haevanlee.com/
4 윤일권 작가 홈페이지: https://www.yoonilkwon.net/
5 황규민 작가 홈페이지: https://www.kyuminhwang.com/
6 이빈소연 작가 홈페이지: https://leebinsoyeon.com/
더프리뷰 서울 2025 외부 전경 (사진: 박예린)
2025년 더프리뷰 서울이 올해로 다섯 번째 회차를 맞았다. 특히 ‘변화’와 ‘새로움’을 주요 키워드로 내세운 올해 더프리뷰에서는 한남과 성수에서 열렸던 지난 회차와 달리 서울역 근처 옛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간 특성을 적극 활용한 행사 구성이 돋보였다. 올해 참여한 곳은 총 40개 갤러리의 약 175명의 작가다. 갤러리별 부스 외에도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무대, 영상 스크리닝, 스페셜 부스 구성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처럼 더프리뷰 서울 2025는 명확한 기획의도와 형식적 실험을 통해 잠시 머무는 감각들을 생성하며, 아트페어의 전형적 흐름을 벗어난 감응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좌) 더프리뷰 서울 2025 설치 전경 (사진: 박예린)
(우) 더프리뷰 서울 2025 Film 섹션 전경 (사진 제공: 캡션 서울)
■ 주목할 큐레이션
올해 더프리뷰 서울에는 오브제후드, 레이블갤러리, 옵스큐라 등 익숙한 이름부터 캡션 서울, 에이피오프로젝트 등 비교적 새로운 공간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갤러리들이 참여했다. 그 중에서도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데서 나아가 명확한 전시 기획 의도와 그에 상응하는 작품 간의 긴밀한 연결을 보여주는 갤러리들이 두드러졌다. 이들 부스는 참여 작가들의 작업 세계를 하나의 유기적 서사나 감각의 흐름 안에 배치함으로써, 관람자에게 보다 밀도 있는 시각적 경험을 선사했다. 일례로, 예술공간 의식주는 플랫하고 섬세한 붓질을 통해 신체의 연약한 부분과 미세한 감각, 감정의 파편을 흩뿌리는 여섯 작가의 작업을 부스 전반에 걸쳐 소개했다. 주로 소품 위주로 구성된 큐레이션은 조용한 긴장과 밀도의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예컨대, 박진주 작가의 회화는 손가락 말단을 클로즈업한 이미지의 캔버스 가장자리에 마치 반창고를 연상케 하는 아이보리색 종이테이프가 부착되어 있었고, 수연 작가의 작품은 방금 막 모눈종이에서 그려 걸어 둔 듯 가볍고 섬세한 질감을 구현했다. 이들 갤러리가 제시한 주제의식과 형식적 전략은 아트페어와 부스라는 제한된 시공간적 조건에서도 전시로서의 완결성과 고유한 리듬을 확보하고 있었다.
카다로그 부스 전경 (사진 제공: 카다로그)
카다로그에서는 이동근, 하슬기, 임성빈, 임하은, 이서연 등 다섯 명의 작가가 참여한 가운데, 감각과 시각적 재현 사이의 어긋남, 이미지와 사물의 간극을 탐색하는 작업들을 소개했다. 각 작가의 조형 언어는 상이했지만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인식의 지점이라는 공통점을 매개로, 하나의 공간 안에 유기적인 리듬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임성빈 작가는 나뭇잎이나 식물 이미지 등을 사실적인 사진으로 촬영한 뒤, 이를 직육면체 상자 같은 인위적인 구조로 접어낸 조각 작업을 선보였고, 임하은 작가는 나뭇가지, 모래알, 자갈 등의 자연물이 마치 정물화와 같이 배열되는 순간을 포착해 회화로 옮겼다. 한편 하슬기 작가는 축축함, 시큼함 같은 감각적 체험을 추상적이고 촉각적인 조각으로 재현하며 감각과 재현의 관계를 질문한다. 이동근 작가는 임시 거주 공간인 텐트 구조와 기워진 천의 형상을 참조하여, 도시를 감각하는 지리적 경험을 설치 작업으로 풀어냈다. 특히 야외 공간을 점유하는 그의 작업은 붉은 건물 외벽과 묘하게 어우러졌다.
이동근, 카다로그 (사진 제공: 카다로그)
이와 더불어 카다로그 부스에서는 관람자 참여형 프로그램 <프레카리오 시티(Precario City)>가 운영되었다. 이 보드게임은 김다겸과 박노완이 결성한 팀 ‘프레카리아트’의 협업 작업으로, 저임금·저숙련 불안정 노동 계급을 의미하는 신조어 프레카리아트(Precariat) 개념을 반영해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프레카리아트로 살아가는 예술가의 생존 전략과 작업의 지속 가능성을 다룬다. 문명 붕괴 이후 예술이 중심이 된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플레이어는 예술가가 되어 작업을 제작하고 전시하며, 거래와 비평, 질병과 감정 상태 같은 현실적 요소를 전략과 우연을 통해 조율해 나가야 한다. 최대 4인의 플레이어가 마스터와 함께 참여하는 이 게임은 유희적인 방식으로 실제 예술가의 삶을 시뮬레이션하는 실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전혀 즐겁지 않은 삶 그 자체였을 지도 모른다. 유독 이 부스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는 이 게임이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 불안정한 현실을 살아가는 예술가의 삶의 감각에 묘하게 접속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프레카리아트, <프레카리오 시티>, 카다로그 (사진 제공: 카다로그)
2023년부터 종로구에서 운영중인 포에버 갤러리는 작가이자 교육자인 최태윤이 설립한 현대미술 공간으로, 현대미술의 지속가능성과 다양성, 그리고 접근성의 실천을 핵심 원칙으로 삼는다. 특히 서울의 수많은 대안공간 및 갤러리 중 휠체어 사용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에 주목해 장애인 접근성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점이 특징적인 공간이다. 포에버는 관용, 환대, 공동 번영의 가치를 실천하며, 기성 작가와 신진 작가, 순수예술과 실험예술, 디자인과 공예, 공연예술과 교육,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지우고, 그 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예술적으로 실험하는 데 주력한다.
포에버갤러리 부스 전경 (사진: 박예린)
포에버갤러리는 이번 더프리뷰 서울에서 작가 민과 이요를 소개한다. 민은 젠더, 무성애 정체성, 관계의 감정 구조를 회화와 설치로 풀어낸다. 전반적으로 민의 작업은 ‘연대하지 못하는 존재’에서 출발하여, 비규범적 감정 구조를 시각화하고, 정동적 상상력을 통해 타자성과의 공존 방식과 타자들 간의 ‘낯선 공감’의 가능성을 상기시킨다. 부스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대형 작품 〈퍼레이드〉는 형광천, 퍼포먼스 의상, 조각 텍스트 등으로 구성된 행진 형식의 설치 작업이다. 민은 이 작품에서 '비(非)연대적 집단성'이라는 아이러니한 키워드를 중심에 놓는다. ‘함께 걷는다’는 퍼레이드의 형식을 차용하면서도, 이질적인 형형색색의 인물 형태는 그것이 모종의 목적이나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는 이질적 존재들의 임시적이고 불협의 집합임을 드러낸다.
민, 포에버갤러리 (사진: 박예린)
부스 안쪽에는 작가가 직접 제작한 벽화를 중심으로, 감정과 관계의 역동성을 담은 회화 및 설치작업들이 이어졌다. 민 작가의 〈실뜨기〉와 〈인형놀이〉는 각각 유년기의 놀이를 모티프로 삼아, 연대와 친밀성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시도한다. 〈실뜨기〉는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는 협동 놀이로, ‘함께함’이라는 개념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규정되어 왔는지를 탐색한다. 작가는 이 놀이가 전제하는 규칙성과 호흡의 동기화를 통해, 유성애 중심의 연대 서사에서 배제된 존재들의 위치를 가시화한다. 반면, 〈인형놀이〉는 타인의 감정을 흉내내고 역할을 학습하는 사회화의 구조를 드러내며, 인형은 발화하지 않지만 감정을 투사당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작품은 감정의 강요와 사랑에 대한 사회적 규범이 개인의 감각을 어떻게 지우는지를 묻는다.1
요이, <내가 헤엄치는 이유>, 2023, 2-채널 영상, 스테레오 사운드 설치, 포에버갤러리 (사진: 박예린)
물과 여성의 신체 경험을 교차시키는 작업을 지속해온 요이(Yo-E Ryou)는 뉴욕에서의 활동과 번아웃을 거쳐 제주로 이주한 이후, 해녀학교 등록과 지역 공동체와의 교류를 통해 물리적‧문화적 경계를 넘는 감각적 언어를 발견해왔다. 시각예술과 디자인을 공부한 작가는 영상, 사운드, 텍스트, 퍼포먼스를 결합해 언어 이전의 감정과 기억을 섬세하게 조직하며, 삶과 예술, 리서치를 유기적으로 엮는 실천을 이어간다.
요이, 〈말하는 물, 쓰는 몸>, 2025, 혼합재료, 59.4 × 84.4 cm, 포에버갤러리 (사진: 박예린)
〈내가 헤엄치는 이유(Why I Swim)〉(2023)는 제주에서 수영을 다시 배우는 과정을 따라가며 자기 회복의 감각을 담은 시적 영상 에세이다. 반복적으로 물에 들어가고, 숨을 쉬고, 몸을 띄우는 행위들은 감정적으로 ‘잠겨 있던’ 과거를 천천히 해체하고 새롭게 발화하는 과정이 된다. 이 작업은 하나의 편지처럼 구성되며, 수중 촬영과 바람 소리, 내레이션과 텍스트가 얽혀 침묵과 고백, 신체와 언어의 경계를 부드럽게 흐린다. 특히 영상과 연계된 리딩 퍼포먼스는 신체적 경험을 언어로 재구성하는 과정 자체를 퍼포먼스화함으로써, 관람자에게 물리적 감각과 서사적 몰입을 동시에 제안하는 더프리뷰의 Spotlight로 주목받았다. 더프리뷰에서는 영상 작업과 함께 드로잉 작업 〈말하는 물, 쓰는 몸〉(2025)을 선보이며, 물과 글쓰기의 유비적 관계를 감각적으로 풀어낸다.2
드로잉룸은 밈모와 이해반 작가의 작업을 중심으로, 종교와 전쟁, 접경지대의 풍경이라는 주제를 회화와 설치로 풀어냈다. 불확실성과 위기의 시대에 예술이 어떻게 시대적 감수성을 포착하고,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 응답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주제의식이 돋보였다. 밈모와 이해반은 전쟁의 위협과 (광기에 가까운) 종교적 열망, 접경지대의 생태적 유산과 정치적 긴장이 공존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시대적 조건을 조망한다.
이해반 작가는 지정학적 경계와 완충지대의 풍경을 회화로 재현하고, 전쟁과 평화, 충돌과 정지 사이의 서사적 긴장을 리서치, 스토리텔링, 풍경화 등의 방법으로 탐구한다. 이번 더 프리뷰 서울에 소개된 장면들은 정치적 구획과 무형의 긴장을 자연 풍경과 종교적 제의로 재현한다. 예컨대 〈배틀그라운드(Battleground)〉(2023)는 제례의 장소, 하늘로 비상하는 새, 무지개빛 창살, 그리고 신화적 생명력을 품은 자연에 대한 작가의 관심까지 전부 하나의 화면에 녹여낸 작업이다. 특히 이번에는 캔버스 뒤에 놓여져 마치 유령처럼 숨은 듯한 신발과 함께, 캔들이 꽂힌 조그마한 여성 누드 세라믹 조각 <Flower Lady>가 함께 디스플레이 되어 작품 전체에 일종의 제의적 분위기를 부여하였다. 발처럼 번져가는 곡선의 붓질과 보라, 남색, 연두, 황금빛이 혼재하는 이 색면들은, 문자 그대로 ‘전장’이라기보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불안, 폭발과 폭력, 그리고 무력한 수용의 상태와 같은 정서적 파장을 추상적 방식으로 감각화한다. 작품 중앙을 가로지르는 백색의 곡선은 마치 낙하하거나 상승하는 에너지의 궤적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춤추는 불꽃이나 영적 흔적처럼 화면을 감돈다. 이해반의 또 다른 출품작 〈Orange Zone〉(2022)은 경계와 안전, 그리고 자유의 조건을 보다 우회적으로 재현한다. 작품 제목이자 작품이 그 자체로 말하고 있는 ‘주황색 구역’은 가시성과 생존의 조건을 동시에 상징하는 시각적 경계선이다. 한편 화면 속에 드러나는 백조의 이미지는 작가가 삶과 죽음, 생태와 정치, 기억과 이동의 문제를 함께 포개어내고자 작가가 새와 관련된 다양한 리서치를 수행한 결과이기도 하다.3
밈모, 드로잉룸 (사진: 박예린)
밈모 작가는 오랜 시간 인류가 ‘염원’을 담아 전달해온 장치라는 점에서 성물(聖物)과 무기, 종교적 기호와 구조물의 혼성적 이미지를 통해 폭력성과 신성함, 수호와 파괴 간의 유사성과 복합적 층위를 다룬다. 이번 더프리뷰에서 작가의 출품작은 크게 두 방향의 실험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과거 종교건축에서 차용한 양식적 요소를 동시대의 시각적 기호들과 결합하여 조형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성스러운 것이 어떻게 이미지화되고 소비되는지를 비판적으로 탐색한다. 둘째는 전선, 레일, 조명과 같은 비건축적 장치들, 즉 건축적 공간 안에서 기능하지만 건축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들을 작업의 주요 구성 요소로 삼는다. 여기에 더해 작가는 응원봉, 안티드론건 등 저항과 대중문화의 물성을 끌어들여, 권위와 비판, 통제를 교차한다.
작가는 이번 더 프리뷰 서울에서 드로잉룸 섹션 외에도 Spotlight로 조명되어, 별도의 공간에서 개인 설치 작업 〈청야(Ruinenempfindsamkeit)〉를 선보였다. ‘폐허의 감응성’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이 전시는 건축이 단지 공간의 외형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능적 확장으로 기능해왔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건축이라는 개념을 더 이상 완결된 구조물로 보지 않고, 포스트휴먼 또는 논휴먼, 탈건축, 반건축 등 ‘건축 아닌 것들’의 담론으로 확장하며, 건축의 경계와 규범 자체를 해체하려는 시도를 이어간다.
밈모, 〈청야 (Ruinenempfindsamkeit)〉. 드로잉룸 (사진 제공: 드로잉룸)
그의 작품은 전파되고, 각인되고, 오해될 때 결국 맹목적 염원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종교와 전쟁이 공유하는 광기의 형태를 조형한다. 이는 총구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레일, 강철로 제작된 리브 볼트와 돔 등 고딕 종교건축 장식, 성경적 장면을 다루는 스테인드 글라스 대신 천사의 형태를 닮은 전투기가 그려진 창문 장식 등으로 형상화된다. 이로써 작품은 폭력과 신성, 파괴와 수호가 중첩되는 이 세계의 모순을 감각적으로 드러내고, 우리가 너무 멀어 손 닿지 않는 것, 그러나 반드시 닿아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응시를 요청한다.
■ 주목할 프로그램
(좌) 신관수, <Slider> (사진: 박예린)
(우) 박상호, <PLOT> (사진: 박예린)
한편, 올해에도 더 프리뷰 서울은 부스 전시 외에도 야외와 실내 공간을 유동적으로 활용한 Spotlight 전시와 퍼포먼스, 스크리닝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장면을 연출했다. 행사장에 들어서자마자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신관수 작가의 《Slider》였다. 샤워(SHOWER)가 소개한 이 작업은 놀이기구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목재 구조물로, 작가가 전시 디자인과 건축 현장에서 쌓아온 경험을 공간 조형으로 풀어낸다.
페이지룸8에서 선보인 박상호의 <PLOT> 시리즈 역시 주목을 끌었다. 문학적 서사를 기반으로 한 이 설치 작업은 회화적 패턴과 추상적 그래픽 요소를 조합해, 전시장의 잔디 공간과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이야기’와 ‘구조’를 연결하는 박상호 특유의 시선은 서울역으로 옮겨진 더프리뷰 서울의 전시 공간에 다채로운 서사성을 부여했다.
더프리뷰 서울 2025 퍼포먼스 섹션 전경 (사진 제공: 더프리뷰)
퍼포먼스 프로그램도 더 프리뷰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했다. d/p가 기획한 64J의 <목림삼(木林森)>은 신체를 에너지 단위로 환산하는 개념적 접근을 바탕으로, 사물과 움직임의 관계를 전복하는 공연이었다. 슬랙 와이어와 밸런스를 활용한 퍼포먼스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예술과 신체 사이의 경계를 새롭게 사유하게 했다. d/p가 소개하는 또 다른 퍼포먼스 <서커스게임즈>는 함서율과 이준상으로 구성된 서커스 디 랩(Circus D. Lab)이 선보였다. 이들은 저글링, 무대 오브제, 동작의 리서치를 바탕으로 서커스를 감각적 언어로 재구성하며, 더 프리뷰 서울의 복합적 공간성과 매체 간 접속 가능성을 실감하게 했다.
■ 주목할 작가
아트페어는 한정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수많은 작업들이 교차하는 장이다.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짧은 체류 시간 동안 서사의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작업은 드물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도 다음 소개하는 작가들은 이러한 전시 환경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자신만의 시각언어로 압축된 서사를 제안하는 핵심적인 작품으로 눈에 띄었다. 이들은 미감과 정제된 구조 그리고 형식의 밀도로, 하나의 전시된 작품을 넘어서 자신이 사유하고 구축해온 세계의 입구를 조용히 열어 보였다.
안주은 Jueun An / 정재열 Jae Youl Jeoung
오에이오에이 부스 전경 (사진 제공: 오에이오에이)
오에이오에이는 이번 더 프리뷰 서울에서 ‘Everyday Shift’를 주제로, 일상의 반복 속에서 문득 스쳐 지나가는 감각과 기억의 잔상을 회화, 드로잉, 설치 등 다양한 매체로 포착하는 작업들을 선보였다. 네 명의 작가가 참여한 이번 전시는 조용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삶의 장면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안주은과 정재열의 작업은 전시의 분위기와 방향을 동시에 이끌었다. 1999년생으로 올해 첫 개인전을 연 젊은 작가 안주은은 평범한 구조물과 도구에 스민 삶의 흔적에 주목해, 사물에 깃든 ‘살아가려는 의지’를 회화적으로 구현한다. 최근 개인전 《남을 것 What Remains》(2025)에서 선보인 작업들은 작물이 자라는 데 사용된 지지대나 비닐봉지, 기능을 다한 리어카 같은 대상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구조물은 대부분 쓰임을 다한 후 방치되거나 해체된 채 환경에 흡수되거나, 오염물로 남는다. 거센 바람이나 이글거리는 태양 등 극적인 환경이 설정된 캔버스 안 공간에서 인간의 쓰임에 따라 생과 사의 흐름이 결정되는 사물이 품은 생명력을 강조한다.
(좌) 안주은,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1)>, 2023, Water mixable oil on canvas 40.9×31.8cm, 오에이오에이 (사진 제공: 오에이오에이)
(우) 안주은,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0)>, 2023, Water mixable oil on canvas, 116.8×80.3cm, 오에이오에이 (사진 제공: 오에이오에이)
(좌) 정재열, <Preserved love story>, 2022, All purpose flour, salt ad water, 4.6 x 5 x 0.5 cm, 오에이오에이 (사진 제공: 오에이오에이)
(우) 정재열, <A glass of water>, 2025, Acrylic, pencil on paper 10x15cm (Frame 35.5x43.5cm), 오에이오에이 (사진 제공: 오에이오에이)
부스 한켠에는 조용하고 단정하게 정재열 작가의 설치 작업이 걸려 있었다. 정재열의 작업은 사소한 사물에 감정을 각인하는 섬세한 방식으로, 특정 장소나 순간에 각인된 기억의 흔적을 고정시킨다. 마치 누군가의 집에 놀러가서 오래된 먼지나 때묻은 낡은 커튼을 발견할 때처럼 그의 작업은 사적인 정서의 세밀한 감각을 자극한다. 이번 부스에서도 그는 작품과 액자 프레임 자체를 일종의 기억을 보관하는 장소로 다루며 관람자에게 자신의 기억과 사랑을 담아 보낸다. <Preserved love story>(2022)는 밀가루, 소금, 물로 구운 얇은 ‘쿠키’에 말 그대로 ‘영원한 사랑’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도록 밀봉한 작업으로, 과자처럼 바삭하고 연약해서 사라지기 쉬운 감정의 성질을 드러내는 동시에 애정어린 기억을 보존하는 시도이다. 거기에 새겨진 문장은 그 감정이 한때 존재했고, 여전히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낸다. 함께 전시된 <A glass of water>(2025)는 연필 드로잉과 동일한 모양으로 도려진 아크릴 자가 액자에 나란히 걸린 작품이다. 이 자는 실제로 작가가 제작한 사물로, 드로잉의 요소이자 물과 같이, 측정되지 않는 감정의 단위를 재는 상징적 도구로 기능한다. 표준화된 도구의 형태를 빌려오되, 그것이 담아내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사적이고 정서적인 대상이 된다.
김도빈 Dobin Kim
실린더 부스 전경 (사진 제공: 실린더)
실린더는 이번 더프리뷰에서 2000년생의 젊은 작가 김도빈의 작품을 단독으로 소개했다. 김도빈 작가는 보호와 폐쇄, 침투와 불안을 동시에 품은 공간으로서, 완결된 건축물이 아니라 반쯤 폐허가 되거나 쌓아 올리는 중인 ‘집’을 그려낸다. 작가의 작품에서 벽체와 나무 문짝, 바닥과 천장 등 공간의 경계를 짓는 건축적 요소들은 단단하고 수직적인 형태를 해체한 채 낡고 설은 자신의 몸들끼리 유동적으로 얽어들어간다.
<Two Nights>(2025)는 흙과 곰팡이, 벽돌과 노출된 골조가 그대로 드러나는 폐가의 실내를 배경으로 한다. 문이 없는 벽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시선은 열린 구조를 따라 안쪽으로 깊어지는 듯하지만, 앞면과 뒷면의 벽은 멀고 가까움을 구분하지 않은 채 서로 뒤얽혀 원근법적 질서를 흩트린다. 한편 〈Child Waving His Hand〉(2025)는 골동품 상자에서 꺼낸 듯한 장면으로, 즐거웠던 어느 날의 정원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불러온다. 작품 하단의 작은 상자에서 시작된 시선은 중앙의 창문을 거쳐, 상단부의 투명한 유리 너머로 손을 흔드는 아이에게 이른다. 그러나 아이의 얼굴은 이미 흐릿해졌고, 안뜰처럼 보이는 공간 또한 명확히 구획되지 않은 채 여러 시간층과 뒤섞인다. 이렇듯 김도빈 작가가 그려내는 주거 공간은 개인의 시간과 기억이 교차하고 스며드는 감각적 접촉의 장으로 재구성된다.
(좌) 김도빈, <Child Waving His Hand>, 2025, 캔버스에 유채, 130x90cm, 실린더 (사진: 박예린)
(우) 김도빈, <Two Nights>, 2025, 캔버스에 유채, 61x50cm, 실린더 (사진 제공: 실린더)
윤일권 Yoon Ilkwon / 황규민 Hwang Kyumin
2018년 망원동에 문을 연 이래 예술가 주도의 전시 실험을 지속해온 아티스트-런 스페이스 별관(OUTHOUSE)에서는, 이번 더프리뷰에서 《Tilt me Softly》라는 타이틀 아래 7인의 작가가 제안하는 ‘균형 밖의 감각’을 조명했다. 그 중 윤일권과 황규민의 작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울어짐을 감각하고 그것을 다시 그리는 회화적 방식을 제안한다.
(좌) 1) 윤일권, <돌덩어리>, 2025, Drypoint on plaster, 19x12x5cm. 2) 윤일권, <달리기>, 2025, Drypoint on plaster, 25x25x6cm, 별관 (사진: 박예린)
(우) 윤일권, <사라짐을 기억하기 위한 드로잉- 구령대>, 2024, Inking on engraved plates, 40x40cm, 별관 (사진: 박예린)
윤일권 작가는 흐릿하거나 어긋난 이미지, 멈칫하는 동작들을 통해 가속화된 세계와 일원화된 삶의 방향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하고, 현대인이 놓치고 있는 감각을 다시 돌아보도록 유도한다. 이번 출품작은 2024년 별관에서 열린 개인전에 선보였던 작업으로, 작가의 개인사와 깊이 연결된 백사마을의 풍경을 담고 있다. 그는 각인된 판 위에 잉크를 덧입히는 방식을 택해, 이미지를 선명하게 새기면서도 동시에 흐릿하게 지워내는 모순적인 인쇄 방식을 실험한다. 반투명하고 바랜 색감, 연약한 대비 속에서 디테일은 흐려지고 인상만이 남는다. 그 결과, 화면은 사라짐과 잔존이 겹쳐지는 기억의 모호한 지점을 감각적으로 재구성한다. 한편 작품에 새겨진 미세한 요철은 기억의 심상을 물질의 표면에 각인하려는 시도이자, 사라짐에 저항하지 않되 남아 있는 감각을 더듬고 포착하려는 작가의 회화적 방법론을 드러낸다. 이렇듯 작가는 사라져가는 장소를 기억하기 위한 방식으로, 물리적으로 소멸하는 공간과 정서적으로 남겨지는 장소 사이의 긴장을 다룬다.4
황규민, <화보18 - 박소현화보 - 부유하는 물덩이>, 2023, 한지에 목판 156x63.6cm (각 31.1x21.1cm), 별관 (사진: 박예린)
황규민 작가는 가상의 인물 ‘황씨(b.1874)’를 설정하여, 그가 동시대 서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상상하며 황씨의 학습을 위한 매뉴얼로서 화보(畵譜)를 제작한다. 이 화보, 즉 황규민의 작품 한 점 한 점은 각각 독립된 회화적 단위이자 특정한 배치로 모였을 때 하나의 거대한 화면을 이루는 모듈적 구조를 갖는다. 작가는 최근 자신의 회화만으로 구성하던 화보의 범위를 동시대 다른 작가의 작업까지 확장하여 제작하고 있으며, 화보의 형식과 배치 또한 변형과 조합의 실험을 이어 오고 있다. 이번에 소개된 두 점의 ‘박소현’ 화보는 그러한 시도로서, 황씨가 박소현의 수묵 작업을 관찰하고 해석하며 기록한 것처럼 제작된 작업이다. 작품은 분수와 물길을 주제로 작업해온 작가 박소현의 회화적 방식과 이미지 어휘를 참조하여 제작되었으며, ‘부유하는 물덩이’라는 제목 또한 원 작품명에서 차용한 것이다. 황씨의 시선을 빌려 동시대 서화를 탐색하는 이 회화적 시뮬레이션은, 전통적 양식과 현대적 표현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면서도 서화, 동양화, 동시대 서화 간의 연결 지점을 유희적으로 펼쳐 보인다.5
안진영 Jinyoung Ahn
피에스센터 부스 전경 (사진 제공: 피에스센터)
2024년 을지로 철공소 골목에 문을 연 피에스센터는 이번 더프리뷰에서 김채리, 박소라, 안수인, 안진영, 얀 톰자 오시에츠키(Jan Tomza-Osiecki), 허창범 등 6인의 작가를 소개하는데, 그 중에서도 안진영의 작업은 특히 주목할 만했다. 안진영 작가는 세상에 태어난 존재들의 의미와 쓰임을 사유하며, 자연의 미세한 리듬을 가늘고 반복적이면서도 밀도 높은 판화 드로잉으로 옮겨 온다. 바람, 비, 빛, 어둠 같은 자연 현상과 동식물의 생존 방식에서 영감을 받은 안진영의 작품은 생명의 섬세한 빛과 파동을 포착하려는 듯했다. 이번에 소개된 두 점의 작품은 나무 상자 안에 구성된 연극무대 같은 설치 형식으로, 판화 드로잉이 팝업처럼 입체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크지 않은 크기이지만, 얕고 깊음, 안과 밖, 앞과 뒤의 공간이 교차하는 이 무대의 입체적 구성과 시각적 밀도는 생명체 간의 관계에 대해 사유하는 조형적이면서도 시적인 풍경을 구성하기에는 충분한 크기로 보였다.
(좌) 안진영, <땅 위의 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 온 검은 그림자>, 피에스센터 (사진: 박예린)
(우) 안진영, <사람과 사람이 그리고 사랑이 가까워 질 때>, 피에스센터 (사진: 박예린)
이빈소연 Leebinsoyeon
미학관은 전시 기획과 아트 컨설팅, 교육, 출판, 아카이빙 등 다각적인 실천을 통해 동시대 예술의 다양한 층위를 탐색해 왔으며, 이번 더프리뷰 서울에서는 염지희, 이빈소연 등 5인의 작가가 참여했다. 이번 더프리뷰에 출품된 이빈소연 작가의 회화들은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발히 활동해온 작가의 이력이 반영된 디지털 회화로, 장식적이고 플랫한 스타일을 적극 활용하는 작가의 미감을 그대로 엿볼 수 있었다. 말, 리본, 손톱, 진주, 매니큐어 등 여성성을 환기하는 단편적 기호들이 화면 위에 배치되며, 이들은 장면 간 서사를 구성하기보다는 감정의 신호처럼 작동한다.
이빈소연, <집들이 선물>, 2024, Ink on PET(digital painting), paper panel, 102x82cm, 미학관 (사진: 박예린)
이빈소연은 여성의 욕망과 야망의 복잡한 역학이 미시적 일상 속에서 매 순간 작동한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진담과 농담’을 넘나드는 과장되고 허황된 정치적 서사를 구성한다. 이러한 서사는 현실과 허구를 쉼 없이 교차하고 겹치며, 여성 연대의 바깥에서 미끄러지는 존재들의 좌충우돌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이빈소연의 작업에서 사랑은 병리적 유머로, 욕망은 장식의 기호로, 연대는 어긋난 복제로 표현된다. 그 결과 감정은 연속적 서사로 수렴되지 못한 채 분절된 감각의 군집으로 해체된다. 그녀는 욕망의 대상화된 표면이 아니라, 그 표면을 구성하는 시선과 기호의 배열, 그리고 감정이 미끄러지며 파편화되는 찰나를 포착한다.6
(좌) 캡션서울 부스 전경 (사진 제공: 캡션서울)
(중) 홍장오, 옵스큐라 (사진 제공: 옵스큐라)
(우) 강나래, 레이블갤러리 (사진 제공: 레이블갤러리)
그 외에도 여러 갤러리들이 신선한 작가군과 매체 실험이 돋보이는 작업들을 선보였다. 캡션서울은 이용재, 정유진, 쉬저후이(Zehui Xu)의 회화와 설치를 통해 재현, 기억, 정체성의 구조를 탐색했으며, 레이블갤러리의 강나래 작가는 반복되는 가사노동을 단서로 삼아 주방세제와 뒤집개 같은 일상 오브제를 세라믹 조각과 오브제 설치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그 외 옵스큐라갤러리에서는 박치호, 정광민, 홍장오 등 중견작가들이 깊이 있고 실험적인 작업을 선보이며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더프리뷰 서울 2025에서는 다양한 작가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감각을, 표면 위에 잠시 머무는 장면들로 구체화했다. 짧지만 선명하게 시선을 붙드는 체류의 순간이 관람자의 시선 속에 조용히 남겨졌을 것이다.
더프리뷰 서울 2025 외부 전경 (사진: 박예린)
이렇게 2025년 더프리뷰 서울에 참여한 갤러리들과 작가들은 구획된 장르나 주제의 틀을 벗어나, 감각적 리듬과 서사의 중첩 속에서 작품을 통해 시대적 감수성을 드러냈으며, 관람자는 자신만의 호흡으로 그 감응의 파장을 경험했다. 더 프리뷰 서울은 이제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감각적 장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올해 전시에서는 강한 메시지나 선언보다는, 조용히 머물다 사라지는 감각의 단편들, 어긋난 관계들 속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공명, 그리고 각자의 리듬으로 잔상처럼 남는 감응의 서사가 인상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잠시 머무는 감각들’이라는 표현은, 올해 더 프리뷰 서울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언어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소비되지 않고도 머무를 수 있는 감각, 잠깐의 정지 속에서 발생하는 사유의 가능성에 대한 제안이었다.
Written by 박예린(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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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 작가 홈페이지: https://miin-yu.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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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윤일권 작가 홈페이지: https://www.yoonilkwon.net/
5 황규민 작가 홈페이지: https://www.kyuminhwang.com/
6 이빈소연 작가 홈페이지: https://leebinsoye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