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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으로 쌓아 올린 염원 — 뮤지엄 SAN, 이배 대규모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

김민주
202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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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엄 SAN 본관 입구, <Issu du feu>, 800x250x250cm, 스틸 프레임에 숯, 2026 ⓒ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사진 제공: 뮤지엄 SAN)


한솔문화재단의 문화예술공간 뮤지엄 SAN(관장 안영주)이 ‘숯의 작가’로 불리는 이배의 대규모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를 4월 7일부터 12월 6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미술관 전관을 아우르는 역대 최대 규모로, 작가가 30여 년간 천착해 온 ‘숯’ 작업을 중심으로 자연의 순환과 시간, 존재에 대한 사유를 집약적으로 선보인다.


전시 제목 ‘En attendant’는 ‘기다림’이라는 시간의 상태를 가리키지만, 이는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 속에서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시간, 즉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 직전의 생성의 상태를 의미한다. 작가는 간담회에서 “이 시간은 수동적인 시간이 아니라 에너지를 응축하는 능동적인 시간”이라며, “완결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어떤 것을 염원할 수 있는 중요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최근 한국에서 발생한 산불과 같은 재해를 언급하며, 이러한 기다림의 시간은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도 더 나은 미래를 염원하는 현재의 마음과 맞닿아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전시는 회화, 조각, 설치, 영상에 이르는 작업을 통해 ‘기다림’과 ‘순환’이라는 개념을 물질과 공간의 경험으로 확장한다. 특히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뮤지엄 SAN의 건축과 긴밀히 호응하며, 관람객이 공간을 따라 이동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서사적 경험으로 작동하도록 구성되었다. 작가는 이 공간에 대해 “이미 존재하던 자연과 치악산의 풍경에 스며들고자 던 안도 다다오에게 영감을 받았다”며, 건축이 자연을 존중하며 자리 잡은 방식처럼 자신의 작업 역시 그 흐름에 조화롭게 놓이기를 바랐다고 밝혔다. 이러한 태도는 전시의 핵심 구조인 <White>와 <Black> 공간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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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엄 SAN 청조갤러리 로비, <Brushstroke>, 227.3x181.8cm(each) 16ea, Charcoal Ink on Paper, 2026 ⓒ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사진 제공: 뮤지엄 SAN)


전시의 시작점인 본관에는 높이 8미터에 달하는 대형 설치 <불로부터 (Issu du feu)>가 자리한다. 수많은 숯을 쌓아 올린 이 작업은 불을 통과한 물질이 다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순환의 과정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산에 올라 돌을 하나씩 쌓으며 염원을 담던 우리의 전통적 행위에서 영감을 받았다”며, 숯을 쌓는 행위 역시 하나의 염원을 축적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청조갤러리 로비에 설치된 <붓질 (Brushstroke)> 연작은 자연광이 유입되는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풍경을 만든다. 작가의 수행적 몸짓이 남긴 거대한 흔적은 시간과 빛에 따라 다른 표정을 드러내며, 관람객에게 마치 자연 속을 산책하는 듯한 경험을 제공한다. 작가는 이 공간을 “자연과 관람객이 자유롭게 호흡하는 장”으로 설정하며, 붓질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리듬이 만나는 순간을 드러낸다.


청조갤러리 1 <White>와 청조갤러리 2 <Black>은 이배 작업의 핵심적인 이중 구조를 보여준다. 검정은 빛을 흡수하며 모든 가능성을 품는 상태이고, 흰색은 여백과 열림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특히 <Black> 공간에 전시된 숯 회화는 작가가 오랫동안 존경해 온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전통 회화의 정신을 동시대적 물질로 확장한 사례로 읽힌다. 청조갤러리 3 <Becoming>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작업으로, 작가의 정체성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청도에서 실제 모내기가 이루어지는 장소의 흙을 옮겨온 논 설치 위에, 논에서 직접 붓질하는 장면을 담은 영상이 결합된 이 작업은 자연, 신체, 시간의 순환을 하나의 장면으로 통합한다. 작가는 “자연의 변화에 따라 수행되는 농부의 반복적인 노동과 예술가의 붓질은 다르지 않다”며, 자연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로서의 예술을 강조했다. 또한 청도의 저수지에 부유하는 설치 작업을 실시간으로 연결해 상영함으로써, 디지털 환경 속에서도 자연과 동시대 문명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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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엄 SAN 청조갤러리 3관, <Becoming>, video, sound, color. 13min05sec, 2026 ⓒ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사진 제공: 뮤지엄 SAN)


마지막 야외 ‘무의 공간’에는 약 10미터 규모의 브론즈 <Brushstroke> 조각들이 배치되어 자연과 건축, 조형이 하나의 풍경으로 확장된다. 관람객은 이 사이를 거닐며 계절과 빛, 그리고 산세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지는 장면을 경험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이배의 작업은 물질적 실험을 넘어, 자연의 순환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를 사유하는 하나의 태도로 확장된다. 특히 ‘기다림’을 둘러싼 작가의 발언처럼, 완성되지 않은 상태와 불완전성은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과 염원의 조건으로 전환된다.


《En attendant: 기다리며》는 숯이라는 물질을 통해 생성과 소멸,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을 응시하게 하며, 예술과 자연, 인간의 행위가 어떻게 하나의 흐름 속에서 맞닿는지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결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를 포함한 시간의 과정에 주목하게 하며, 우리가 지나쳐 온 ‘기다림의 시간’이 지닌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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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 작가 프로필 ⓒ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사진 제공: 뮤지엄 SAN)


이배(1956 - )는 30여 년간 '숯'이라는 단일한 매체를 파고들어 한국의 정신성을 국제적인 현대미술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세계 무대에서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는 작가다.

 

1956년 경상북도 청도에서 태어난 작가는 유년기의 기억과 동아시아의 전통적 토대 위에 자신만의 '정신성의 매체'를 현대적으로 변주하며 독보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 왔다. 1982년 홍익대학교를 졸업한 후, 1989년 파리로의 이주는 서구 현대미술의 다원화된 흐름 속에서 작가 고유의 예술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방의 낯선 환경에서 마주한 '숯'은 단순한 재료의 대안을 넘어, 작가 내면의 동양적 원천과 정신성을 일깨우는 철학적 매개체로 승화되었다. 소멸을 거쳐 새로운 에너지를 응축하는 숯의 생명력은 수묵의 깊은 사유를 품어내며, 그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독보적인 조형 언어로 자리 잡았다.

 

1999년 이후 <불로부터(Issu du feu)> 연작을 통해 숯을 정신성과 물질성이 교차하는 매체로 재정의하며, 절단과 연마의 과정을 통해 숯 내부에 잠재된 빛과 생명성을 드러냈다. 2004년 이후에는 숯가루와 밀랍, 아크릴 미디엄을 결합한 회화로 확장하여, 반투명한 층위 속 물질의 축적을 통해 시간의 지층과 심연의 공간감을 구축했다. <붓질(Brushstroke)> 연작은 숯을 매개로 한 신체적 행위와 호흡의 흔적을 수행적 회화로 확장하며 자연의 순환과 대지의 질서에 응답하는 조형적 실천으로 이어지고, 이는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달집태우기>에서 제의적 차원으로 집약된다.

 

프랑스 문화예술 훈장 기사장(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2000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2023년) 등을 수상하였고, 세계 주요 미술관과 재단에 소장되어 한국 현대미술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Edited by 김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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