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아무것도 될 수 없는 곳’이다. 나의 시간과 너의 시간, 여기와 저기, 모든 것이 뒤섞이고 얽힌 채 휘몰아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역학이 새롭게 규정되고, 여러 실시간이 번쩍이며 다가온다. 인간과 비인간, 의미와 무의미,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의미와 지위를 부여받는 동시에 많은 것이 외곽으로 밀려난다. 완벽하게 새로운 것이 끼어들 틈 없는 시대, 이질적인 성격들이 계속하여 부착되며 생성되는 포화와 과잉의 경제에서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느냐의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의 영역이 된다.1)
이 새로운 (또는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상황은 한편으로는 가능성의 확장을, 한편으로는 세계에 대한 신뢰의 상실을 야기한다. 기존의 역사적이고 과정적인 논리로는 포착되지 않는 ‘예외(원칙에는 맞지 않는 것)’가 계속하여 생성된다. 이 시대에서 지배적인 담론이나 비평적 방법론의 가능성을 믿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모든 판단은 끊임없이 유보되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동시대성은 당연하게도, 언제나 최전선에서 세계의 변화를 맞이해 온 예술이라는 창을 통해 그 모습을 비추어 왔다.
새로운 (또는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동시대 미술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것의 포화로 포착되곤 하는 동시대. 그리고 이러한 동시대적 혼란, 그 이질성과 혼종성 그리고 탈-매체적 경향과 무한한 재매개의 양상을 특징으로 가지는 동시대 미술. 동시대 미술은 이전까지의 미술과는 달리 역사화 될 수 없으며, 지배적 담론으로 정리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리고 이러한 비확정성은 미술사가 이전까지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진단되곤 했다. 역사화와 담론화의 시도를 빈번히 무력화하는 동시대 미술의 창발성 앞에 예술의 새로운 존재론을 제안하고자 하는 담론적 도전이 이어졌으나, 이러한 시도들은 때때로 미술이라는 분야 자체에 대한 모호함만을 자극하기도 했다.
동시대 미술이 가지는 비물질적이고 탈-장르, 탈-매체적 경향은 미술이 새롭게 처하게 된 매체 환경과 제작 방식에의 주목으로 이어졌다.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포스트-미디엄[(post-medium)’ 담론을 통해 물리적 실체를 가지는 것으로서만 논의될 수 없는 시점에서 매체를, 니콜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는 ‘포스트프로덕션(postproduction)’ 담론을 통해 존의 기존의 것을 차용하거나, 재매개하거나, 되풀이하는 등의 새로운 제작 방식을 분석했다. 데이비드 조슬릿(David Joselit)은 이로부터 출발하되 예술 이후(‘Post’가 아닌 ‘After’)를 제안하며 이미지의 창발성과 ‘재조합’, ‘재매개’ 그리고 ‘연결’을 원리로 가지는 예술의 새로운 존재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동시대 미술이 그토록 완전히 새로울까? 할 포스터(Hal Fost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시대 미술’이라는 카테고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그 감각, 이질성 속에서 역사적 확정성과 개념적 정의, 비평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롭게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의 실천들이다.2)
동시대와 동시대 미술, 와닿는 감각은 분명 생경하다. 이러한 생경함은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 미술을 바라보는 확장된 비평적 관점을 요구한다.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비확정성의 감각은 분명 인식론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글은 세계와 미술은 존재론적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특징을 보다 투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고도화되어 왔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에 동시대 미술에 관한 앞선 논의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비평적 방법론으로 ‘예술의 새로운 존재론’이 아닌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식의 매체특정성 논의3)를 적용하고자 한다.
그린버그의 자기비판적 관점은 오늘날의 양상을 분석하는 데에 유효하다. 세계와 미술은 그 본질적인 특성을 점차 투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리고 이를 대하는 우리는 그 특성을 이해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인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의 매체로서의 이미지
매체특정성 논의는 미술의 자율성, 그리고 미술이라는 분야의 정체성을 설정하기 위해 등장했으며, 이를 위해 여전히 요구된다. 그린버그의 매체특정성 개념이 견지하는 자기비판적 메커니즘은 동시대까지의 미술 경향을 연속적으로 읽을 수 있는 비평적 관점으로의 가능성을 지닌다. 세계와 미술은 그 본질적인 특성에 다가가는 방식으로, 그리고 이를 대하는 우리는 그 특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인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린버그식 매체특정성의 구조를 확장성 있게 수정한다. 이러한 시도는 미술을 장르로 분화시키기 이전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린버그가 ‘회화’의 매체로 ‘캔버스와 물감’에 주목했다면, 회화의 자리에 ‘미술’을, ‘캔버스와 물감’의 자리에 ‘이미지’를 대입한다.
그린버그식 매체특정성 개념의 확장
이러한 구조적 전위는 그린버그의 매체특정성 개념이 미술에서 ‘회화’라는 ‘종류(장르)’를 ‘종’으로 오역한 채 논의되어 왔다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미술에서 회화, 조각, 영상, 설치 등의 장르는 종이 아니라 ‘종류’이며, 이때 ‘종’에 해당하는 것은 이미지라는 것이다.4) 이러한 구조하에 미술의 매체는 ‘이미지’가 된다. 흥미롭게도, ‘이미지’를 미술의 매체로 상정하면 동시대까지의 미술이 자신의 고유의 권한 영역에 보다 순수하게 다가가는 양상으로 고도화되어 왔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지 매체특정성의 구조도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인가?
이미지는 고정하기 위한 기술이다. W.J.T. 미첼(Mitchell)은 이미지가 이중의식(double consciousness)을 가진다고 설명했다. 욕망에서 비롯되는 창작 및 소유의 욕구, 그리고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파괴의 욕구가 그것이다. 창작 및 소유의 욕구는 포착하여 고정하고자 하는 욕망,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다. 한편, 파괴의 욕구는 고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한 번 만들어지고 나면 창조자의 손을 떠나 창발적으로 진화되는 통제 불가능한 이미지에 관한 두려움이다. 즉 이미지를 둘러싼 창작과 파괴의 욕구는 모두 포착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기인하며,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는 포착되지 않는 것을 고정하고, 구체화하고, 시각화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고정하기 위한 기술인 이미지 그 자체는 결코 고정될 수 없는 것이다. 이미지는 살아있으며 창발하는 것, 물질적 차원에 쉽게 부착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조슬릿은 동시대 미술에서 이미지가 새로운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고 설명하며 이미지는 포화된 것, 창발하는 것, 무한히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오늘날 더욱 투명하게 다가올 뿐 이미지가 본래 가지는 특성이다. 이미지란 구체적인 형태로 고정된 것, 이 형태에 부착되며 생성되는 것이지만, 고정된 형태보다 존재적으로 광활한 것이다. 예를 들어 회화가 물리적으로 완결된 상태라면, 회화에 부착된 이미지는 여전히 생성 중인 상태의 것, 완결되지 않은 무언가이다.5)
중요해지는 것은 연결되는 것
예술은 항상 세상을 반영하는 창이었다. 이는 미술의 매체인 ‘이미지’의 특성이 세계의 원리와도 닮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이미지의 이중의식도, 인간의 본능인 포착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기제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도, 결코 완결되지 않은 생성되는 상태의 것이라는 점도 그러하다. 당대를 대표하는 인식론과 미술이 분리된 채 논의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탈-매체, 탈-물질, 과감한 해석의 허용, 무한한 재매개와 새로운 창작 방식 등은 예술 작품을 이미지를 생성하고 있는 고정된 물적 실체에서 이미지 자체의 특성을 그 자체에 함유한 것으로 확장시킨다. 동시대 미술에서 비물질적이고 비확정적인 이미지의 특성은 내용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적극적으로 탐구된다. 이미지를 미술의 매체로 바라볼 때, 동시대 미술은 지금까지의 어떤 미술 양식보다도 매체특정성을 적극적으로 성취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동시대 미술의 ‘이미지 매체특정성’에 관해 살펴보기 위해 동시대성을 내용적 주제로 기획된 전시 To Be Anything, To Be Nothing (2023)에서 드러나는 이미지의 특성을 분석하고자 한다.

To Be Anything, To Be Nothing (2023) 전시 전경 ©C.A.S.(좌)
To Be Anything, To Be Nothing (2023) 전시 전경 ©C.A.S.(우)
전시 To Be Anything, To Be Nothing (2023)은 가능성과 불확실성이라는 양자의 극대화로 읽힐 수 있는 동시대성에 주목하는데, 이때 전시의 주요한 키워드는 ‘쓰레기’이다. 여기에서 쓰레기란 새로운 것이 없는 동시에, 끊임없이 재매개 되고 연결되며 재탄생하는 포화의 메커니즘과 이로 인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다성적인 경계에 서 있는 오늘날의 삶을 은유한다. 전시는 동시대성을 드러내는 작가 5인으로 구성되는데, 해당 전시가 동시대성의 내용적 측면에 주목하여 기획되었다면, 본 글은 이들 작품에서 동시대 미술의 이미지 매체특정성을 분석하는 데 주목하고자 한다.

To Be Anything, To Be Nothing (2023) 전시 전경, 좌측부터 허수연, 〈Immortal〉, 2023/〈Terrible Joy〉, 2023/ 〈True Stories〉, 2023©C.A.S.
먼저 버려진 종이 폐기물로 만든 종이죽을 이용한 허수연의 작품이다. 창 옆에 놓인 회화 〈Terrible Joy〉는 희극 속엔 비극이, 비극 속엔 희극이 존재함을 이야기하며 희비극이 교차하는 지점에 주목한다. 이는 감정의 모호성을 회화 이미지로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다. 이때 작가가 수집한 폐기물로 만든 종이죽이 재료가 되며, 단순한 물감과는 다른 축적된 시간성을 구현한다. 작가는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쓰레기를 수집해 이를 통해 이미지를 구축한다. 이는 계속하여 흐르는 시간에 내포된 감정과 기억을 붙잡아 이미지화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다른 작품 역시 종이죽을 재료로 한다. 허수연의 작품에서 폐기되었던 것들은 시간과 의미를 내포한 채 생성의 과정 중에 있는 것, 즉 이미지로 전위된다.

박다빈, 〈Inhale-exhale〉, 2022, 영상, 4분 47초 ©C.A.S.
박다빈의 영상 작업〈Inhale-exhale〉에서도 이미지의 특성이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해당 작품은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산출해 낸 미래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때 인공지능은 인간의 호흡까지도 예측하는 모습을 보인다. 해당 영상에서 인공지능이 생산해 낸 결과물은 불완전한 지점을 가지는데, 이와 동시에 영상을 시청하는 시점에도 학습을 지속하며 보다 정교화되는 과정 안에 있다. 예술 작품이 인공지능의 학습과 그 산출물까지를 매체로 포용하면서, 이미지가 가지는 창발성이 작품에 형식적으로 이식된다. 이는 물질적 지지체를 기반으로 하던 기존의 미술과는 확실히 다른 비물질적이며 과정적인 예술일 것이다.

Skingraphy, 〈피부정전〉, 2023, 영상, 12분 ©C.A.S.(좌)
Skingraphy, 〈갗그물〉, 2023, 나무, 바퀴, 와이어, 라텍스, 기계장비, 가변크기 ©C.A.S.(우)
앞선 두 작가의 작업이 이미지의 특징을 작품 자체의 매체적 특징으로 소화하며 동시대 미술에서 매체특정성이 고도화 되어가는 양상을 보여준다면, Skingraphy(송아리+정은형)의 작품은 따라 동시대에서 대두되는 예술의 역할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Skingraphy의 퍼포먼스적 조각(performative sculpture)〈갗그물〉영상 작업〈피부정전〉은 모두 구분에서 자유로운 중성적이고 다성적인 복합체로서의 피부에 주목한다. 이들의 작업에서 피부 내피가 전면적으로 드러나며 낯설고 이질적인 감각을 자아낸다.
늘 신체 내부에 공존하는 것임에도, 생경함이 느껴지는 경험은 동시대에서 우리가 감지하게 되는 새로운 인식론을 상기한다. 기술 발전으로 인해 오늘날 모든 존재론적 구분, 심지어는 가상과 실재의 구별 마저도 혼란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실을 구성하고 개인의 세계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해지는 것은 연결성이다. 즉 더욱 강한 강도로 연결된 것이 더욱 현실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6) 이러한 상황은 동시대 세계에서도, 그리고 동시대 미술의 실천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무엇보다도 연결성이 중요해지는 상황 말이다.

양승욱, 〈남는 건 사진뿐〉, 2023, 디지털 프린트, 가변크기, ©C.A.S.
양승욱의 작품은 동시대 미술에서 드러나는 연결성의 메커니즘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작가가 인화해 두고 사용하지 않았던 사진으로 가득 채운 벽, 〈남는 건 사진뿐〉에서 무의미하게 방치되었던 사진은 과거의 흔적을 담은 채 전시장에서 다시 현재화된다. 관람자는 원하는 사진을 선택해 가지고 갈 수 있는데, 이때 선택되는 사진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이미지 과잉 시대에서 오브제의 미학이 네트워크의 미학으로 전환되는 양상을 보인다.7) 이미지 과잉 경제에서 예술은 단일 작품이 아니라 창발적인 이미지이자 유통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본 글은 이전까지의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동시대 미술을 역설적이게도 매체특정성의 관점으로 읽어보려는 시도로부터 출발했다. 이 과정에서 ‘이미지’를 미술의 매체로 상정하고, 고정하고자 하는 것인 동시에 고정될 수 없는 것인 이미지의 특성이 지니는 동시대성과의 유사성에 주목하며 이를 전시를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과 예술을 움직이게 하는 방식 모두에서 ‘연결성’이 중요해짐을 발견한다. 기술 발달로 인해 거의 모든 물리적 한계가 무너져 가는 동시에 인간중심주의가 낳은 자연적 차원의 장벽을 마주하고 있는 현시점 더욱 강하게 연결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을, 세계를 구성하게 된다. 오브제 중심의 매체 개념의 폐기와 더는 새로운 것이 없는 이미지 과잉의 세계에서 예술 작품의 생산과 감상에서도 이미지의 연결성과 행위성은 핵심적인 지점이 된다. 오늘, 중요해지는 것은 연결되는 것이다.
Writer 이민영(Collective 188, 독립기획자)
예술학을 공부하고 미술 안에서 전시, 연구, 비평으로 발화한다. 독립 기획자로서 동시대 미술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다수의 전시를 기획해 왔으며,〈(가칭)이건희기증관 전시프로그램 연구〉(2023)를 시작으로 미술 현장을 둘러싼 연구 프로젝트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왔다.
비정형적이나 가시적인 예술 실천을 지향하며, 비가시적인 동시대 예술의 경향을 전시, 교육, 출판 등의 가시적 영역으로 치환하여 조명하고 기록하는 큐레토리얼 콜렉티브 'Collective 188'을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태그(TAG)’는 신진 평론가를 발굴하기 위한 Thiscomesfrom의 비평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는 10주간 매주 금요일마다 새로운 비평가의 글을 소개하며, 릴레이로 진행됩니다. 각 참가자는 자신의 비평 글과 함께 다음 참가자를 지목(태그)하여 챌린지를 이어갑니다.
1) 이민영, 「전시 서문」, 『TO BE ANYTHING TO BE NOTHING』, 현대미술사학회 C.A.S.(기획), 탈영역우정국(협력) 전시도록, 2023, p. 7.
2) Hal Foster, “Questionnaire on ”The Contemporary“, October, Vol. 130 (Fall, 2009), p. 3.
3) 그린버그는 예술이 제공하는 경험의 종류는 예술만의 고유한 권한 내에 있을 때 유의미하며 각각의 예술 분야는 각자 자신의 고유한 권한 영역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이때 이 권한 영역을 결정짓는 기준으로 그가 주목한 것이 바로 ‘매체’이다. 모더니즘 회화 비평에서, 그린버그는 회화의 매체로 캔버스와 물감을 상정하고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드러나는 색채보다는 회화만이 가지는 고유한 영역인 캔버스의 평면성에 특히 주목했다. 이러한 그의 비평적 관점 하에 모더니즘 회화는 평면성이라는 매체특정성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갔다. 그러나 이러한 전개 속에서 모더니즘 미술의 한 가지 분과일 뿐인 추상회화에만 천착하게 되는 경향성, 미술의 지나친 제도화와 자율성과 순수성의 강조로 인한 삶과의 유리 등은 포스트모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할 개념으로서 도전받게 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 「모더니스트 회화(1961)」, 『예술과 문화』, 조주연 (역), 2019, 참조)
관련하여 인용: “색채는 무대예술에서 뿐 아니라 조각에도 공통되는 하나의 기준 혹은 방법이다. 평면, 그 2차원성은 회화예술이 어떤 다른 예술과도 공유할 수 없는 유일한 조건이며, 따라서 모더니스트 회화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평면성 그 자체에로 향하는 것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 2019, p. 67.)
4) 이러한 구조적 전위와 이미지에 관한 사유는 W.J.T. 미첼의 이미지론에 빗지고 있다. 미첼은 이미지론을 전개함에 있어 ‘그림’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때 그림은 ‘이미지가 구체화된 것’을 의미한다. 회화, 스케치, 조각, 사진과 영화, 공연 등 여러 형태로 시각화될 수 있는 것이다. 미첼은 이미지와 그림의 관계를 종과 종에 의해 종류가 부여된 유기체의 관계에 비유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종’이라는 상위개념 아래에 ‘인류’, ‘조류’, ‘포유류’, ‘...’ 등의 ‘종류’라는 하위개념이 속하듯이 ‘이미지(종)’ 아래에 ‘회화’, ‘조각’, ‘...(종류)’가 속한다는 것이다. (W.J.T. 미첼,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미지의 삶과 사랑(2006)』, 김전유경 (역), 그린비, 2010 참조)
5) 미첼은 이미지에 대해 설명하며 그림과 이미지를 구별하는데, 이때 ‘그림’이란 ‘이미지가 구체화된 것’이다. 그림은 가상적 요소, 물질적 요소, 상징적 요소의 복합적인 조합(assemblege)으로, 특정 매체에 한정되지 않으며 회화와 스케치, 조각과 같은 전통적 양식들뿐만 아니라 사진과 영화, 공연 등 여러 형태로 시각화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미첼, 2010, p. 24 참조)
6) 빌렘 플루서, 『피상성 예찬: 매체 현상학에 대하여』, 김성재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참조
7)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역), 현실문화연구, 20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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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아무것도 될 수 없는 곳’이다. 나의 시간과 너의 시간, 여기와 저기, 모든 것이 뒤섞이고 얽힌 채 휘몰아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역학이 새롭게 규정되고, 여러 실시간이 번쩍이며 다가온다. 인간과 비인간, 의미와 무의미,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의미와 지위를 부여받는 동시에 많은 것이 외곽으로 밀려난다. 완벽하게 새로운 것이 끼어들 틈 없는 시대, 이질적인 성격들이 계속하여 부착되며 생성되는 포화와 과잉의 경제에서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느냐의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의 영역이 된다.1)
이 새로운 (또는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상황은 한편으로는 가능성의 확장을, 한편으로는 세계에 대한 신뢰의 상실을 야기한다. 기존의 역사적이고 과정적인 논리로는 포착되지 않는 ‘예외(원칙에는 맞지 않는 것)’가 계속하여 생성된다. 이 시대에서 지배적인 담론이나 비평적 방법론의 가능성을 믿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모든 판단은 끊임없이 유보되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동시대성은 당연하게도, 언제나 최전선에서 세계의 변화를 맞이해 온 예술이라는 창을 통해 그 모습을 비추어 왔다.
새로운 (또는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동시대 미술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것의 포화로 포착되곤 하는 동시대. 그리고 이러한 동시대적 혼란, 그 이질성과 혼종성 그리고 탈-매체적 경향과 무한한 재매개의 양상을 특징으로 가지는 동시대 미술. 동시대 미술은 이전까지의 미술과는 달리 역사화 될 수 없으며, 지배적 담론으로 정리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리고 이러한 비확정성은 미술사가 이전까지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진단되곤 했다. 역사화와 담론화의 시도를 빈번히 무력화하는 동시대 미술의 창발성 앞에 예술의 새로운 존재론을 제안하고자 하는 담론적 도전이 이어졌으나, 이러한 시도들은 때때로 미술이라는 분야 자체에 대한 모호함만을 자극하기도 했다.
동시대 미술이 가지는 비물질적이고 탈-장르, 탈-매체적 경향은 미술이 새롭게 처하게 된 매체 환경과 제작 방식에의 주목으로 이어졌다.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포스트-미디엄[(post-medium)’ 담론을 통해 물리적 실체를 가지는 것으로서만 논의될 수 없는 시점에서 매체를, 니콜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는 ‘포스트프로덕션(postproduction)’ 담론을 통해 존의 기존의 것을 차용하거나, 재매개하거나, 되풀이하는 등의 새로운 제작 방식을 분석했다. 데이비드 조슬릿(David Joselit)은 이로부터 출발하되 예술 이후(‘Post’가 아닌 ‘After’)를 제안하며 이미지의 창발성과 ‘재조합’, ‘재매개’ 그리고 ‘연결’을 원리로 가지는 예술의 새로운 존재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동시대 미술이 그토록 완전히 새로울까? 할 포스터(Hal Fost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시대와 동시대 미술, 와닿는 감각은 분명 생경하다. 이러한 생경함은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 미술을 바라보는 확장된 비평적 관점을 요구한다.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비확정성의 감각은 분명 인식론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글은 세계와 미술은 존재론적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특징을 보다 투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고도화되어 왔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에 동시대 미술에 관한 앞선 논의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비평적 방법론으로 ‘예술의 새로운 존재론’이 아닌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식의 매체특정성 논의3)를 적용하고자 한다.
그린버그의 자기비판적 관점은 오늘날의 양상을 분석하는 데에 유효하다. 세계와 미술은 그 본질적인 특성을 점차 투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리고 이를 대하는 우리는 그 특성을 이해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인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의 매체로서의 이미지
매체특정성 논의는 미술의 자율성, 그리고 미술이라는 분야의 정체성을 설정하기 위해 등장했으며, 이를 위해 여전히 요구된다. 그린버그의 매체특정성 개념이 견지하는 자기비판적 메커니즘은 동시대까지의 미술 경향을 연속적으로 읽을 수 있는 비평적 관점으로의 가능성을 지닌다. 세계와 미술은 그 본질적인 특성에 다가가는 방식으로, 그리고 이를 대하는 우리는 그 특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인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린버그식 매체특정성의 구조를 확장성 있게 수정한다. 이러한 시도는 미술을 장르로 분화시키기 이전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린버그가 ‘회화’의 매체로 ‘캔버스와 물감’에 주목했다면, 회화의 자리에 ‘미술’을, ‘캔버스와 물감’의 자리에 ‘이미지’를 대입한다.
그린버그식 매체특정성 개념의 확장
이러한 구조적 전위는 그린버그의 매체특정성 개념이 미술에서 ‘회화’라는 ‘종류(장르)’를 ‘종’으로 오역한 채 논의되어 왔다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미술에서 회화, 조각, 영상, 설치 등의 장르는 종이 아니라 ‘종류’이며, 이때 ‘종’에 해당하는 것은 이미지라는 것이다.4) 이러한 구조하에 미술의 매체는 ‘이미지’가 된다. 흥미롭게도, ‘이미지’를 미술의 매체로 상정하면 동시대까지의 미술이 자신의 고유의 권한 영역에 보다 순수하게 다가가는 양상으로 고도화되어 왔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지 매체특정성의 구조도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인가?
이미지는 고정하기 위한 기술이다. W.J.T. 미첼(Mitchell)은 이미지가 이중의식(double consciousness)을 가진다고 설명했다. 욕망에서 비롯되는 창작 및 소유의 욕구, 그리고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파괴의 욕구가 그것이다. 창작 및 소유의 욕구는 포착하여 고정하고자 하는 욕망,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다. 한편, 파괴의 욕구는 고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한 번 만들어지고 나면 창조자의 손을 떠나 창발적으로 진화되는 통제 불가능한 이미지에 관한 두려움이다. 즉 이미지를 둘러싼 창작과 파괴의 욕구는 모두 포착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기인하며,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는 포착되지 않는 것을 고정하고, 구체화하고, 시각화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고정하기 위한 기술인 이미지 그 자체는 결코 고정될 수 없는 것이다. 이미지는 살아있으며 창발하는 것, 물질적 차원에 쉽게 부착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조슬릿은 동시대 미술에서 이미지가 새로운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고 설명하며 이미지는 포화된 것, 창발하는 것, 무한히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오늘날 더욱 투명하게 다가올 뿐 이미지가 본래 가지는 특성이다. 이미지란 구체적인 형태로 고정된 것, 이 형태에 부착되며 생성되는 것이지만, 고정된 형태보다 존재적으로 광활한 것이다. 예를 들어 회화가 물리적으로 완결된 상태라면, 회화에 부착된 이미지는 여전히 생성 중인 상태의 것, 완결되지 않은 무언가이다.5)
중요해지는 것은 연결되는 것
예술은 항상 세상을 반영하는 창이었다. 이는 미술의 매체인 ‘이미지’의 특성이 세계의 원리와도 닮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이미지의 이중의식도, 인간의 본능인 포착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기제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도, 결코 완결되지 않은 생성되는 상태의 것이라는 점도 그러하다. 당대를 대표하는 인식론과 미술이 분리된 채 논의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탈-매체, 탈-물질, 과감한 해석의 허용, 무한한 재매개와 새로운 창작 방식 등은 예술 작품을 이미지를 생성하고 있는 고정된 물적 실체에서 이미지 자체의 특성을 그 자체에 함유한 것으로 확장시킨다. 동시대 미술에서 비물질적이고 비확정적인 이미지의 특성은 내용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적극적으로 탐구된다. 이미지를 미술의 매체로 바라볼 때, 동시대 미술은 지금까지의 어떤 미술 양식보다도 매체특정성을 적극적으로 성취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동시대 미술의 ‘이미지 매체특정성’에 관해 살펴보기 위해 동시대성을 내용적 주제로 기획된 전시 To Be Anything, To Be Nothing (2023)에서 드러나는 이미지의 특성을 분석하고자 한다.
To Be Anything, To Be Nothing (2023) 전시 전경 ©C.A.S.(좌)
To Be Anything, To Be Nothing (2023) 전시 전경 ©C.A.S.(우)
전시 To Be Anything, To Be Nothing (2023)은 가능성과 불확실성이라는 양자의 극대화로 읽힐 수 있는 동시대성에 주목하는데, 이때 전시의 주요한 키워드는 ‘쓰레기’이다. 여기에서 쓰레기란 새로운 것이 없는 동시에, 끊임없이 재매개 되고 연결되며 재탄생하는 포화의 메커니즘과 이로 인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다성적인 경계에 서 있는 오늘날의 삶을 은유한다. 전시는 동시대성을 드러내는 작가 5인으로 구성되는데, 해당 전시가 동시대성의 내용적 측면에 주목하여 기획되었다면, 본 글은 이들 작품에서 동시대 미술의 이미지 매체특정성을 분석하는 데 주목하고자 한다.
To Be Anything, To Be Nothing (2023) 전시 전경, 좌측부터 허수연, 〈Immortal〉, 2023/〈Terrible Joy〉, 2023/ 〈True Stories〉, 2023©C.A.S.
먼저 버려진 종이 폐기물로 만든 종이죽을 이용한 허수연의 작품이다. 창 옆에 놓인 회화 〈Terrible Joy〉는 희극 속엔 비극이, 비극 속엔 희극이 존재함을 이야기하며 희비극이 교차하는 지점에 주목한다. 이는 감정의 모호성을 회화 이미지로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다. 이때 작가가 수집한 폐기물로 만든 종이죽이 재료가 되며, 단순한 물감과는 다른 축적된 시간성을 구현한다. 작가는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쓰레기를 수집해 이를 통해 이미지를 구축한다. 이는 계속하여 흐르는 시간에 내포된 감정과 기억을 붙잡아 이미지화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다른 작품 역시 종이죽을 재료로 한다. 허수연의 작품에서 폐기되었던 것들은 시간과 의미를 내포한 채 생성의 과정 중에 있는 것, 즉 이미지로 전위된다.
박다빈, 〈Inhale-exhale〉, 2022, 영상, 4분 47초 ©C.A.S.
박다빈의 영상 작업〈Inhale-exhale〉에서도 이미지의 특성이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해당 작품은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산출해 낸 미래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때 인공지능은 인간의 호흡까지도 예측하는 모습을 보인다. 해당 영상에서 인공지능이 생산해 낸 결과물은 불완전한 지점을 가지는데, 이와 동시에 영상을 시청하는 시점에도 학습을 지속하며 보다 정교화되는 과정 안에 있다. 예술 작품이 인공지능의 학습과 그 산출물까지를 매체로 포용하면서, 이미지가 가지는 창발성이 작품에 형식적으로 이식된다. 이는 물질적 지지체를 기반으로 하던 기존의 미술과는 확실히 다른 비물질적이며 과정적인 예술일 것이다.
Skingraphy, 〈피부정전〉, 2023, 영상, 12분 ©C.A.S.(좌)
Skingraphy, 〈갗그물〉, 2023, 나무, 바퀴, 와이어, 라텍스, 기계장비, 가변크기 ©C.A.S.(우)
앞선 두 작가의 작업이 이미지의 특징을 작품 자체의 매체적 특징으로 소화하며 동시대 미술에서 매체특정성이 고도화 되어가는 양상을 보여준다면, Skingraphy(송아리+정은형)의 작품은 따라 동시대에서 대두되는 예술의 역할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Skingraphy의 퍼포먼스적 조각(performative sculpture)〈갗그물〉영상 작업〈피부정전〉은 모두 구분에서 자유로운 중성적이고 다성적인 복합체로서의 피부에 주목한다. 이들의 작업에서 피부 내피가 전면적으로 드러나며 낯설고 이질적인 감각을 자아낸다.
늘 신체 내부에 공존하는 것임에도, 생경함이 느껴지는 경험은 동시대에서 우리가 감지하게 되는 새로운 인식론을 상기한다. 기술 발전으로 인해 오늘날 모든 존재론적 구분, 심지어는 가상과 실재의 구별 마저도 혼란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실을 구성하고 개인의 세계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해지는 것은 연결성이다. 즉 더욱 강한 강도로 연결된 것이 더욱 현실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6) 이러한 상황은 동시대 세계에서도, 그리고 동시대 미술의 실천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무엇보다도 연결성이 중요해지는 상황 말이다.
양승욱, 〈남는 건 사진뿐〉, 2023, 디지털 프린트, 가변크기, ©C.A.S.
양승욱의 작품은 동시대 미술에서 드러나는 연결성의 메커니즘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작가가 인화해 두고 사용하지 않았던 사진으로 가득 채운 벽, 〈남는 건 사진뿐〉에서 무의미하게 방치되었던 사진은 과거의 흔적을 담은 채 전시장에서 다시 현재화된다. 관람자는 원하는 사진을 선택해 가지고 갈 수 있는데, 이때 선택되는 사진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이미지 과잉 시대에서 오브제의 미학이 네트워크의 미학으로 전환되는 양상을 보인다.7) 이미지 과잉 경제에서 예술은 단일 작품이 아니라 창발적인 이미지이자 유통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본 글은 이전까지의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동시대 미술을 역설적이게도 매체특정성의 관점으로 읽어보려는 시도로부터 출발했다. 이 과정에서 ‘이미지’를 미술의 매체로 상정하고, 고정하고자 하는 것인 동시에 고정될 수 없는 것인 이미지의 특성이 지니는 동시대성과의 유사성에 주목하며 이를 전시를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과 예술을 움직이게 하는 방식 모두에서 ‘연결성’이 중요해짐을 발견한다. 기술 발달로 인해 거의 모든 물리적 한계가 무너져 가는 동시에 인간중심주의가 낳은 자연적 차원의 장벽을 마주하고 있는 현시점 더욱 강하게 연결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을, 세계를 구성하게 된다. 오브제 중심의 매체 개념의 폐기와 더는 새로운 것이 없는 이미지 과잉의 세계에서 예술 작품의 생산과 감상에서도 이미지의 연결성과 행위성은 핵심적인 지점이 된다. 오늘, 중요해지는 것은 연결되는 것이다.
Writer 이민영(Collective 188, 독립기획자)
예술학을 공부하고 미술 안에서 전시, 연구, 비평으로 발화한다. 독립 기획자로서 동시대 미술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다수의 전시를 기획해 왔으며,〈(가칭)이건희기증관 전시프로그램 연구〉(2023)를 시작으로 미술 현장을 둘러싼 연구 프로젝트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왔다.
비정형적이나 가시적인 예술 실천을 지향하며, 비가시적인 동시대 예술의 경향을 전시, 교육, 출판 등의 가시적 영역으로 치환하여 조명하고 기록하는 큐레토리얼 콜렉티브 'Collective 188'을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태그(TAG)’는 신진 평론가를 발굴하기 위한 Thiscomesfrom의 비평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는 10주간 매주 금요일마다 새로운 비평가의 글을 소개하며, 릴레이로 진행됩니다. 각 참가자는 자신의 비평 글과 함께 다음 참가자를 지목(태그)하여 챌린지를 이어갑니다.
1) 이민영, 「전시 서문」, 『TO BE ANYTHING TO BE NOTHING』, 현대미술사학회 C.A.S.(기획), 탈영역우정국(협력) 전시도록, 2023, p. 7.
2) Hal Foster, “Questionnaire on ”The Contemporary“, October, Vol. 130 (Fall, 2009), p. 3.
3) 그린버그는 예술이 제공하는 경험의 종류는 예술만의 고유한 권한 내에 있을 때 유의미하며 각각의 예술 분야는 각자 자신의 고유한 권한 영역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이때 이 권한 영역을 결정짓는 기준으로 그가 주목한 것이 바로 ‘매체’이다. 모더니즘 회화 비평에서, 그린버그는 회화의 매체로 캔버스와 물감을 상정하고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드러나는 색채보다는 회화만이 가지는 고유한 영역인 캔버스의 평면성에 특히 주목했다. 이러한 그의 비평적 관점 하에 모더니즘 회화는 평면성이라는 매체특정성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갔다. 그러나 이러한 전개 속에서 모더니즘 미술의 한 가지 분과일 뿐인 추상회화에만 천착하게 되는 경향성, 미술의 지나친 제도화와 자율성과 순수성의 강조로 인한 삶과의 유리 등은 포스트모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할 개념으로서 도전받게 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 「모더니스트 회화(1961)」, 『예술과 문화』, 조주연 (역), 2019, 참조)
관련하여 인용: “색채는 무대예술에서 뿐 아니라 조각에도 공통되는 하나의 기준 혹은 방법이다. 평면, 그 2차원성은 회화예술이 어떤 다른 예술과도 공유할 수 없는 유일한 조건이며, 따라서 모더니스트 회화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평면성 그 자체에로 향하는 것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 2019, p. 67.)
4) 이러한 구조적 전위와 이미지에 관한 사유는 W.J.T. 미첼의 이미지론에 빗지고 있다. 미첼은 이미지론을 전개함에 있어 ‘그림’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때 그림은 ‘이미지가 구체화된 것’을 의미한다. 회화, 스케치, 조각, 사진과 영화, 공연 등 여러 형태로 시각화될 수 있는 것이다. 미첼은 이미지와 그림의 관계를 종과 종에 의해 종류가 부여된 유기체의 관계에 비유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종’이라는 상위개념 아래에 ‘인류’, ‘조류’, ‘포유류’, ‘...’ 등의 ‘종류’라는 하위개념이 속하듯이 ‘이미지(종)’ 아래에 ‘회화’, ‘조각’, ‘...(종류)’가 속한다는 것이다. (W.J.T. 미첼,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미지의 삶과 사랑(2006)』, 김전유경 (역), 그린비, 2010 참조)
5) 미첼은 이미지에 대해 설명하며 그림과 이미지를 구별하는데, 이때 ‘그림’이란 ‘이미지가 구체화된 것’이다. 그림은 가상적 요소, 물질적 요소, 상징적 요소의 복합적인 조합(assemblege)으로, 특정 매체에 한정되지 않으며 회화와 스케치, 조각과 같은 전통적 양식들뿐만 아니라 사진과 영화, 공연 등 여러 형태로 시각화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미첼, 2010, p. 24 참조)
6) 빌렘 플루서, 『피상성 예찬: 매체 현상학에 대하여』, 김성재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참조
7)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역), 현실문화연구, 20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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