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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001] 세상 밖 어디든, 언제든: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의 중첩된 시공간들에 대하여

[도판 1]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No Ghost Just A Shell》(2024.4.23.-8.4,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장 입구. ©Thiscomesfrom


이 글은 과거의 전시로부터 왔다. 그리고 이 전시는 더 과거의 시공간으로부터 왔다. 과거로부터 와서 미래로 떠나게 될 이 전시는 얼마 전 막을 내린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No Ghost Just A Shell》(2024.4.23.-8.4,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을 말하는 것이다[도판 1]. 이번 북서울미술관의 전시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프랑스 예술가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와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가 기획하여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진행했던 동명의 예술 프로젝트를 재현한 것으로, 이를 위해 네덜란드 반아베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던 동명의 프로젝트 전체를 가져왔다. 그간 수많은 전시에서 개별 작품들이 선보인 적은 있었지만, 전체 프로젝트(와 작품 대다수)를 선보이는 것은 네덜란드 반아베미술관 소장전(2009-2012) 이후 최초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전시라 할 수 있다.1


[도판 2](좌)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No Ghost Just A Shell》(2024.4.23.-8.4,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 전경. 프랑수아 퀴를레, 〈스크린 증인〉, 2002,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5분.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Thiscomesfrom 

[도판 3](우)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No Ghost Just A Shell》(2024.4.23.-8.4,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 전경. 조 스칸란, 〈죽은 채 도착 셀프 조립 (앤리)〉, 2002, 빌리 책장 부품 (이케아), DIY 매뉴얼, 화환, 가변크기.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Thiscomesfrom 


전시 서문은 이 프로젝트를 소환하면서 “생성형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 환경이 예술의 생산 방식을 크게 변화”시키며 “데이터로 존재하는 디지털 이미지가 감정, 인격, 정체성을 지닌 주체로서 스스로 진화하고 있는 오늘날의 포스트 디지털 시대”를 위한 통찰이 되어주리라 기대하며 이러한 맥락을 간접적으로 언급했다.2 그러나 앤리라는 캐릭터를 통해 예술가의 창조적 역할을 기술이 대신하는 생성적 AI기술의 미래를 다루기에는 앤리는 너무나 텅빈 기호일 뿐이며, 첨단 기술의 맥락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 전시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2000년대 초반 현대 미술계에 중요한 논의들을 불러 일으켰던 역사적 프로젝트를 재현한다는 미술사적 의의 뿐만은 아니다. 반아베미술관의 수장고로부터 수많은 전시들을 거쳐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세계 곳곳에서 분산되고 연장되는 시공간의 중첩 그 자체가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내용이자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공간을 매개하는 가장 작은 단위는 텅 빈 기호, ‘앤리’로부터 시작했다.


[도판 4] 〈앤리〉, 2002, 캔버스에 유채, 198.6×249.6×3.9cm.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Thiscomesfrom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No Ghost Just A Shell)’은 1999년 두 작가가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 ‘케이-웍스(K-Works)’로부터 한 캐릭터의 이미지 저작권을 저렴하게 구입하고 ‘앤리(AnnLee)'라는 이름을 붙인 데서 시작되었다. 프로젝트의 이름 'No Ghost Just A Shell’은 이식 가능한 인간의 의식을 ‘고스트(ghost),’ 그 의식을 내려받을 수 있는 신체를 ‘쉘(shell)’이라 부르는 근미래의 고도화된 기술 사회를 다루는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The Ghost in the Shell〉의 제목을 연상케 한다. 제목 그대로, 앤리는 다양한 작가들에게 의미가 부여될 수 있도록 비어 있는 ‘껍데기(shell)’로 설정되었다. 북서울미술관 전시 한쪽 벽면에 자리한 리처드 필립스(Richard Phillips)의 회화 〈앤리〉(2002)는 필립 파레노의 영상 작품 〈세상 밖 어디든 Anywhere Out of the World〉(2000)의 한 장면을 포착한다[도판 4]. 텅 빈 회색 눈빛에 파란 머리를 한 조악한 3D 그래픽의 여성형 캐릭터. 영상에서 앤리는 화면 밖 관람자들에게 2D 캐릭터일 때의 자신의 사진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한다. 개성이 부여된 비싼 “영웅" 캐릭터들과 달리, 본인은 그저 자신이 팔려야 했을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유통되지 않은 저렴한 “상품”이자 “이미지"이며 하나의 기호이자 “유령이 아닌 그저 껍데기(no ghost, just a shell)”라 지칭하면서.


[도판 5](좌)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No Ghost Just A Shell》(2024.4.23.-8.4,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 전경.  왼쪽: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에스터, 〈안전지대의 앤리〉, 2000,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분 25초.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오른쪽: M/M (파리), 〈앤리: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2000, 종이에 실크스크린, 170.5×117cm.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Thiscomesfrom 

[도판 6](우)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No Ghost Just A Shell》(2024.4.23.-8.4,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 전경. 왼쪽: M/M (파리), 〈벽지 포스터 1.1 (앤리 색상: 세상 밖 어디든)〉, 2000, 종이에 실크스크린, 171.1×117cm.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오른쪽: 피에르 위그,〈백만 왕국〉, 2001,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6분 45초.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Thiscomesfrom 


위그와 파레노는 앤리의 저작권을 예술가 동료들에게 무료로 배포하였고,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에스터(Dominique Gonzalez-Foerster), 멜릭 오하니언(Melik Ohanian), 리암 길릭(Liam Gillick),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 피에르 조셉(Pierre Joseph), 조 스칸란(Joe Scanlan), M/M (파리) 등 약 30명의 예술가 및 디자이너들이 각자 앤리를 작품의 소재로 삼아 작품을 창작했다. 잉여로 남은 이미지 상품이자 텅 빈 기호로서 앤리는 프로젝트 참여 작가들에게 후기 자본주의의 물신화 된 이미지, 디지털 시대의 원본과 복제의 문제, 저급예술로 구분되어 온 만화의 고급 예술로의 침투라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매개체가 되었다. 그러나 앤리를 매개로 다루어지는 다양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젝트에서 여전히 앤리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비유도 상징도 아닌 의미가 부재하는 순환하는 기호일 뿐이었다. 이를테면 프로젝트의 포스터 디자인을 전담했던 디자인 스튜디오 M/M (파리)는 이미지 산업의 기표들을 유희하면서 앤리라는 이미지의 존재론적 ‘의미 없음’을 강조한다.3 〈앤리: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Annlee: No Ghost Just a Shell〉(2000)의 포스터에서, 정유회사 ‘쉘(Shell)’의 로고로 대체된 프로젝트의 제목, 앤리의 2D 이미지, 조형 요소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나 의미가 없다. 〈벽지 포스터 1.1 (앤리 색상: 세상 밖 어디든 Wallpaper poster 1.1. (Annlee Colours: Anywhere Out of The World)〉(2000)은 앤리 캐릭터의 색상만을 추출하여 비정형의 디자인 요소를 조합한 실크스크린 판화이다. 전시장의 큰 벽을 점유하고 있음에도 그것은 작가들의 또다른 포스터들 아래에 붙어, 의미 없는 장소의 배경이자 ‘벽지’처럼 존재할 뿐, 장식적인 목적 이상으로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도판 5, 6].4


[도판 7]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No Ghost Just A Shell》(2024.4.23.-8.4,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 전경.  피에르 조셉과 메디 벨라 카셈, 〈사기꾼 이론〉, 2002,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5분.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Thiscomesfrom 


2002년까지 제작된 작품들은 취리히 쿤스트할레 《No Ghost Just a Shell》(2002) 전시를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 아트 바젤의 불꽃놀이 세레모니를 통해 그녀의 죽음이 공표될 때까지, 일련의 순회전을 거치기 시작했다. 앤리라는 텅 빈 이미지에서 시작하여 각기 다른 매체와 내용으로 의미를 덧입은 작품들의 집합이 ‘전시’라는 하나의 기호 혹은 매체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예술 작품의 효과는 텅 빈 기호인 앤리를 주제로 하는 개별 작품이 아닌, 전체 프로젝트의 맥락에서 작품들의 배열로부터 파생된다. 실제 전시의 시공간이 프로젝트의 중요한 부분으로 틈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프로젝트는 개별 작가들의 작품들을 횡단하며 변화하고 디지털(앤리 캐릭터와 디지털 미디어 작품)과 현실 세계(전시 공간)을 넘나들면서 변화하고 확장되는, 의미 체계의 시공간을 생성해 낸다. 물론 모든 전시는 일시적으로 시공간을 점유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피에르 위그가 이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부분을 “다른 시간에 나타나고 사라지기”와 같이 서로 다른 시공간을 활성화(activate)하는 것에 있음을 강조한 것처럼, 그것은 텅빈 기호로부터 매개된 의미의 시공간의 이동 가능성(mobility)와 다발성을 실험하는 것에 있었다.5


[도판 8]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No Ghost Just A Shell》(2024.4.23.-8.4,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 전경. 리크리트 티라바닛, 〈(유령 독자 C. H.)〉, 2002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9시.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Thiscomesfrom 


따라서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프로젝트의 요체는 앤리라는 껍데기가 의미를 획득하고 가상의 공간에서 현실의 장소로 출현하는 그 과정과 결과 전부. 즉, 작품에서 전시로, 전시에서 전시를 가능케 하는 시공간들의 중첩으로 드러난다. 이 프로젝트의 복잡다단한 속성은 프로젝트 전체를 소장하기 위한 반아베미술관의 순탄치 않은 행정 절차와 학예 연구에서도 볼 수 있다. 2003년 앤리 캐릭터의 저작권이 앤리 자신에게 이양되는 계약 체결 및 네덜란드 반아베미술관 개관과 함께 프로젝트 전체가 소장되면서 프로젝트는 비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예술 프로젝트 전체를 미술관이 인수했다는 점은 미술계에서도 전례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반아베미술관은 소장품의 분류체계와 속성을 개념적, 행정적으로 변경해야 했다. 개별 작품의 소장을 넘어 도록, 전시 등 이 프로젝트를 다양한 매체로 전환하는 시도 끝에 미술관은 이 모든 개념을 포괄하는 ‘프로젝트’의 형태로 소장하였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이 프로젝트가 앤리라는 캐릭터, 캐릭터를 매개로 작품을 제작한 작가의 작품들, 그리고 작품들을 매개로 한 전시, 이 모든 것을 전부 포괄하는 시공간을 점유하기 때문이었다.


앤리라는 캐릭터는 후기 자본주의의 물신화 된 이미지, 디지털 시대의 원본과 복제, 실재와 가상의 문제, 테크노오리엔탈리즘, 사이보그적 신체성 등 2000년대 초의 다양한 주제들을 촉발했지만, 정작 그것의 본질은 텅 비었다는 것에 있다.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은 앤리보다는 캐릭터, 작품, 전시,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연속적인 맥락과 의미의 시공간의 이동과 중첩에서 그 의미를 다한다. 서울시립 북시립미술관에서의 전시가 순회전 이상으로서 의의를 지니고자 했다면, 하나의 기호와 매체로서 시공간을 일시적으로 점유하는 전시 자체의 매체적 특성을 조금 더 강조하는 기획이었어야 하지 않을까. 한편, 시공간의 중첩과 확장이라는 맥락에서 이 프로젝트의 의의를 다시 살펴볼 때, 20년만에 작품이 재현될 때 새롭게 제시되어야 하는 맥락이 전시 전반에서 드러났으면 어떠했을까? 2009년 반아베미술관에서 열렸던 보라빛 카펫과는 다르게, 전시장 곳곳에 바닥을 구획하는 카펫이 그녀의 머리색을 닮은 푸른 색이었을 뿐이다. 비슷하지만 또 아쉽게도. 


Writer 박예린(광주비엔날레재단 전시팀 코디네이터)

예술학과 미술사를 공부했다. 매체로서의 작품과 신체가 맞닿는 역사적이고 동시대적인 순간들에 주목하여 전시를 만들고 글을 쓴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시각성을 다루는 전시로 《제11회 아마도애뉴얼날레》(아마도예술공간, 2024)에 기획자로 참여하였다. 느슨한 연결망을 지향하며 동료들과 함께 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를 발행하고 있으며, 비평의 과정과 결과를 전시 《레테 rete》(서교예술실험센터, 2023, 공동기획)을 통해 실험하기도 했다. 현재 제15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온/오프라인 출판물을 매니징하고 있다.


‘태그(TAG)’는 신진 평론가를 발굴하기 위한 Thiscomesfrom의 비평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는 10주간 매주 금요일마다 새로운 비평가의 글을 소개하며, 릴레이 챌린지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첫 주자는 Thiscomesfrom이 선정하며, 이후 각 참가자는 자신의 비평 글과 함께 다음 참가자를 지목(태그)하여 챌린지를 이어갑니다.


No Ghost Just a Shell : The AnnLee Project, Van Abbemuseum, 2009.4.5.-2012.3.6. (Curated by Christiane Berndes) https://vanabbemuseum.nl/en/exhibitions/no-ghost-just-a-shell-the-annlee-project-1 (2024.8.25. 최초 검색)

2 https://sema.seoul.go.kr/kr/whatson/exhibition/audio_guide?exNo=1274154&audioGuideNo=1281705&photosketchNo=131933&currentPage=1&glolangType=KOR (2024.8.27. 최초 검색)

3 https://vanabbemuseum.nl/en/collection/annlee-no-ghost-just-a-shell (2024.8.27. 최초 검색)

4 https://vanabbemuseum.nl/en/collection/wallpaper-poster-1-1-annlee-colours-anywhere-out-of-the-world (2024.8.27. 최초 검색)  

5 https://scienceandfilm.org/articles/2782/no-ghost-just-a-shell-interview-with-pierre-huyghe (2024.8.27. 최초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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