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시 포스터 사진 제공: 리움미술관
최근 예술계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세 가지 키워드를 뽑아보자면 인류세1, 기후위기, 인공지능(AI)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해당 단어들은 인간의 과거부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단어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활기차게 논의된 인류세를 시작으로, 인류의 사회적 책임과 미래 존속 가능성을 다루는 작업들이 다양해진 것도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겼다. 이런 맥락에서 아니카 이(Anicka Yi)의 전시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전시는 인간-비인간의 관계성, 그리고 생태계와 기술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예술적 언어로 풀어낸다. 또한, 인공지능(AI)와 생물학적 요소를 융합한 작품들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정체성과 존재론적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아니카 이의 작품은 이러한 문제들을 깊게 성찰할 기회를 마련하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에서 지금의 삶을 되짚어 보게 한다.

아니카 이, 사진 제공: 리움미술관, 사진: 이재안
아니카 이(Anicka Yi)는 예술적 상상력과 과학적인 기술을 접목하여 기후위기, 인공지능(AI), 비인간 등 다양한 현대 사회의 이슈들을 영리하게 다루고 있는 작가다. 그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2살 때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90년대부터는 영국에서 패션 스타일리스트로 일했다.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온 그는 30대 중반부터 미술 비전공자로서 예술계에 발을 들이며 또 다른 아웃사이더의 길을 자처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아니카 이는 생물학, 기술철학, 기후위기 등 다양한 주제를 예술로 묶어 자신만의 내러티브(Narrative)를 형성한다.
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아니카 이의 개인전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은 그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총 33점으로 10년 간의 작업 세계를 아우른다. 전시 서문에 따르면, 전시 제목은 불교 수행법 중 간화선(看話禪)에서 사용되는 화두(話頭)의 특성을 차용하여 아니카 이 작업의 명상적이고 영적인 전환을 반영한 것이다.2 이때 화두란 선종의 전문 용어로 공안(公案)이라 할 수 있는데, 공안은 여러 선사(禪師)3와 납자(衲子)4 사이의 문답을 공적인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아니카 이는 이런 공안을 사색을 위한 도구로 이해하고, 작품을 오랜 시간에 걸쳐 반추하고 그 안에 쌓인 의미를 해석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목을 붙였다고 밝혔다.5 이러한 불교적 제목은 서양권에 비해 불교적 개념에 익숙한 한국인들이 자아의 해체, 즉 무아(無我)에 대해 받아들이는 방식을 궁금해하는 작가의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6 아니카 이가 자신의 창작 원천 중 하나로 꼽는 개념은 ‘분인(Dividual)’ 개념으로, 사람을 개인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타인 또는 외부 세상과 관계를 맺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작가는 이 개념을 통해 인간은 생물학의 기본 ‘단위’가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물적, 비생물적 요소와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지구 생태계의 존속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7 결국 전시의 제목은 고정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우주론적 관점에서 생물의 실존적 문제에 집중하고자 했던 아니카 이의 작업을 아주 간결하고도 명확하게 정리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2024. © 아니카 이 사진제공: 리움미술관, 사진: 안드레아 로세티
아니카 이의 작업을 관통하는 것은 생물과 감각, 그리고 기술 간의 연계성이다. 그의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감각은 ‘후각’으로,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톡 쏘는 듯한 독특한 향이 난다. 일반적으로 전시장, 즉 화이트 큐브는 안전하고 권위적인 공간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한 공간에서 맡아본 적 없는 낯선 향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거부감과 불안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러한 불안감은 익숙했던(혹은 전통적인) 질서에서 무뎌졌던 감각들을 일깨워 새로운 감각을 기민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든다. 이번 전시의 메인 향은 조향사 바나베 피용(Barnabe Fillion)과 협업한 향으로 바다, 애니말릭, 플로럴, 감칠맛 노트로 구성되어 시트러스와 해조류, 비 온 뒤 나는 흙냄새, 가솔린 등 매우 복잡한 향을 풍긴다.8 작가는 이 향에 대해 생물화된 기계, 고대의 수생 생물, 원시 환경에 대한 상상을 담아 전혀 다른 세계를 연상시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9 결국 아니카 이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장은 바깥 세상과는 다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존재하는 일종의 멀티버스인 셈이다.
독특한 향을 뒤로 하고 전시장의 커튼을 젖히면 아크릴 판에 담긴 박테리아들과 튀긴 꽃, 고생대 생물체를 연상시키는 기계 조형물, 고치 안에서 윙윙거리는 기계 곤충 등 다양한 작품들과 조우하게 된다. 박테리아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생명체로, 인간과 꾸준히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온 존재이다. 살아있는 박테리아들은 아크릴 판이라는 인공적 환경 안에서 자연물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한다. 이는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두지 않고 생명체들의 삶을 보여주고자 하는 아니카 이의 의도가 전면에 드러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로 작가는 박테리아, 해조류와 같은 유기체를 지구 생태계의 시초로 이해하고, 그들의 생존 능력에 포커스를 맞춰 인간중심적 시간 개념에서 벗어나 전지구적인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니카 이, <또 다른 너>, 2024, 아크릴, LED, MDF, 거울, 양방향 거울, 박테리아, 아가 배지. 200 x 200 x 35 cm, 작가, 리움미술관 및 글래드스톤 갤러리
이런 작가의 의도를 가장 대표적으로 대변하는 작품이 바로 이번 전시의 신작인 <또 다른 너>(2024)다. 끝이 없는 우물처럼 아래로 반복되어 떨어지는 환영을 만들어내는 인피니티 미러(Infinity mirror) 형태의 작품 속에는 해양 유래 형광 단백질을 발현하도록 유전자가 조작된 대장균이 자라고 있다. 연한 녹색을 띄는 박테리아는 합성 생물학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진 인공적인 미생물이면서 해양 생물의 유전자를 가진 해양 생물의 친족이기도 하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고대 생명체인 해조류와 박테리아를 인간의 기술로 합성해 재탄생시킨 존재는 앞으로 전개될 생명체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읽어볼 수 있다.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2024. 사진: 좌은서
아니카 이는 박테리아와 같은 미생물의 유기 물질 분해 작용을 통해 생태계와 인간의 상호작용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패와 재생을 작업의 일부로 끌어들이고자 한다. 그 예시로는 2000년대 초기부터 이어져 온 <덴뿌라 프라이드 플라워 패널 Tempura Fried Flowers Panel>(2000년대~) 시리즈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꽃과 식물을 튀겨 보존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꽃은 본래의 향과 색을 잃게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튀겨진 꽃들은 점차 부패하는데, 이때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박테리아와 같은 미생물이다. 미생물의 성장과 분해 작용은 작품의 일부로서 부패가 단순한 소멸이 아닌 새로운 생명체의 발달 과정임을 보여준다. 하나의 작품 안에서 이뤄지는 변이와 성장, 죽음은 아니카 이의 주요 관심사였던 생명의 순환과 지속성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니카 이, <절단>, 2024, 폼, 석고, 페인트, 덴푸라 꽃 튀김, 유리, 튜브. 245 x 120 x 140 cm, 작가, 리움미술관 및 글래드스톤 갤러리 제공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인 <생물오손 조각 Biofouled>(2024) 연작은 <덴뿌라 프라이드 플라워 패널>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튀긴 꽃들로 따개비가 잔뜩 붙은 채 해상에 부유하는 잔해를 연상시키는 조각을 만드는데, 그 형상은 물에 잠긴 고체에 미생물이 붙어 자라며 형성되는 생물막을 뜻하는 생물오손과 의미가 통한다. 작품이 전시되는 동안 공기 중에 노출된 튀긴 꽃들은 자연스럽게 부패한다. 꽃들이 부패하며 풍기는 시큼한 향은 전시장을 꽉 채우는데, 관람객은 그 향을 맡으며 작품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유기적인 재료로 이루어진 작품의 변화 과정은 자연의 유한성과 라이프 사이클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이를 통해 아니카 이의 튀긴 꽃 연작들은 유기체인 꽃을 주 재료로 활용하고, 미생물을 협업자로 끌어들임으로써 자연의 복잡한 시스템과 지속 가능성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재현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2024. © 아니카 이 사진제공: 리움미술관, 사진: 안드레아 로세티
관람객들의 이목을 끄는 또 다른 작품은 전시장의 곳곳에 매달려 있는 해파리 혹은 플랑크톤을 연상시키는 기계들이다. <방산충>(2023) 시리즈는 5억년 전 고생대 캄브리아기에 처음 등장한 단세포에서 동물성 플랑크톤인 방산충류에서 영감을 얻었다. 실제로 15,000종이 넘는 방산충처럼 다양한 모습을 가진 기계들은 촉수를 접었다 펴며 마치 살아 숨쉬는 생명체처럼 부유하고 있다. 분명 인공물이지만 고대의 자연물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들은 ‘기계의 생물화’를 연구해 온 아니카 이의 관심사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계-생물화’ 작업 중 주목해볼 만한 또 다른 작품으로는 <켈프 조각 Kelp> 시리즈가 있다. 켈프(Kelp)는 바닷속 숲을 형성하는 해조류의 일종으로, 고대 인류가 유라시아 대륙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할 때 해조류 숲을 따라 이동했다는 켈프 하이웨이 학설(Kelp Highway Hypothesis)10을 반영한 작품이다. <켈프 조각>은 곤충의 고치처럼 생겼는데, 그 안에서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애니마트로닉스 나방(animatronic moths)은 기계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곤충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아니카 이가 꾸준히 기계를 생물화 시키는 이유는 기계와의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서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기계에 대한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으나, 인간은 여전히 기계를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작가는 이런 모순점에 주목하여 기계를 양립 가능한 방식, 즉 하나의 생물처럼 만들어 기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유대감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1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2024. © 아니카 이 사진제공: 리움미술관, 사진: 안드레아 로세티
나아가, 아니카 이는 기계를 인간과 함께 살아갈 동반자로 인식한다. 이를 대표하는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공개한 신작인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 Each Branch of Coral Holds Up the Light of the Moon>(2024)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사후에도 작업이 계속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작품으로, 죽음 이후를 탐구하는 <공(公)>에 속하는 첫 번째 작품이다. 소프트웨어 ‘공(公)’은 10여 년간 아니카 이 스튜디오가 생산한 작업물을 데이터 삼아 훈련된 알고리즘으로 작가의 ‘디지털 쌍둥이’로 기능한다. 이번 작품은 공(公)이 시뮬레이션과 머신 러닝을 통해 아니카 이의 작업을 살아있는 가상 생물로 재해석한 것이다. 아니카 이는 공(公)이 3차원적 경험을 넘어 5차원에 해당하는 의식으로 이끌어주는 협업자로 인공지능(AI)을 소개하며,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여 살아가는 미래를 제시한다.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2024. © 아니카 이 사진제공: 리움미술관, 사진: 안드레아 로세티
인류는 기술의 발전을 통해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했다. 이런 인간중심적 사고방식과 행동은 지구 생태계의 균형을 깨트리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기후 변화나 생태계 파괴, 생물 다양성 감소 등이 그 ‘발전’의 부정적 여파다. 이때 아니카 이의 작품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데 의의가 있다. 그는 여러 생명체의 진화와 존재 방식을 탐구하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얽히고 설킨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진화해 왔음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속에서 인간은 생태계의 최고 포식자가 아닌 함께 공생하는 존재로 자리하게 된다.
아니카 이는 단순히 인간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외의 다양한 존재들의 감각으로 세계를 다시 인식하자고 제안한다. 미시적 세계에서 이뤄지는 상호작용을 통해 생태계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유기체들, 인간의 의도와 관계없이 스스로의 방식으로 환경에 반응하는 기계와 인공지능. 생태계의 모든 구성원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자신만의 생존 전략과 관계망을 형성해왔다.
결국 이 전시가 제시하는 바는 분명하다. 인간은 생태계의 일부이며 지구의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생태계의 다른 구성원들이 지닌 고유한 시각과 감각을 수용하는 태도에서 출발할 수 있다. 이 전시를 통해 우리는 기술 발전의 환상에서 벗어나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다. 생태계의 구성원이 지닌 삶의 형태와 취약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간은 전지구적 재난 상황을 타개하고 존속 가능한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다.
Writer 좌은서 (홍익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미술사를 전공하며 인류의 시작부터 포스트휴먼까지 시대를 자유롭게 넘나들어왔다. 그 중에서도 남들이 하지 않는 것, 남들이 보지 않는 것에 유달리 관심이 많다. 소수자, 동물, 식물, 환경 등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존재들에 초점을 맞춘다.
‘태그(TAG)’는 신진 평론가를 발굴하기 위한 Thiscomesfrom의 비평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는 10주간 매주 금요일마다 새로운 비평가의 글을 소개하며, 릴레이로 진행됩니다. 각 참가자는 자신의 비평 글과 함께 다음 참가자를 지목(태그)하여 챌린지를 이어갑니다.
1 인류세: 인류가 지구 기후와 생태계를 급격하게 변화시키며 자연적으로 생성된 지질연대와 구분하기 위해논의되고 있는 명칭이다.
2 https://www.leeumhoam.org/leeum/exhibition/79 (최종 접속 24.10.01)
3 선사: 선정(禪定)에 통달한 승려를 부르는 호칭
4 납자: 불교 선종(禪宗)에서 승려가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호칭 혹은 일반적 승려를 부르는 호칭
5 https://www.harpersbazaar.co.kr/article/1869636 (최종 접속 24.10.04)
6 무아(無我): 고정된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불교의 개념으로, 불교에서는 자아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7 아트인포스트, <아니카 이>, 『퍼블릭아트』, 2023.05, vol.200, pp. 48-89.
8 https://design.co.kr/article/33112 (최종 접속 24.10.04)
9 위와 같음
10 캘프 하이웨이 학설(Kelp Highway Hypothesis):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이 환태평양 해안과 베링 해협에 형성된 해조류 숲을 따라서 유라시아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했다는 학설, https://design.co.kr/article/33112 (최종 접속 24.10.08)
11 https://www.vogue.co.kr/2022/07/11/화학과-생물학으로-예술을-창조한-아니카-이/ (최종 접속 24.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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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시 포스터 사진 제공: 리움미술관
최근 예술계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세 가지 키워드를 뽑아보자면 인류세1, 기후위기, 인공지능(AI)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해당 단어들은 인간의 과거부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단어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활기차게 논의된 인류세를 시작으로, 인류의 사회적 책임과 미래 존속 가능성을 다루는 작업들이 다양해진 것도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겼다. 이런 맥락에서 아니카 이(Anicka Yi)의 전시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전시는 인간-비인간의 관계성, 그리고 생태계와 기술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예술적 언어로 풀어낸다. 또한, 인공지능(AI)와 생물학적 요소를 융합한 작품들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정체성과 존재론적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아니카 이의 작품은 이러한 문제들을 깊게 성찰할 기회를 마련하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에서 지금의 삶을 되짚어 보게 한다.
아니카 이, 사진 제공: 리움미술관, 사진: 이재안
아니카 이(Anicka Yi)는 예술적 상상력과 과학적인 기술을 접목하여 기후위기, 인공지능(AI), 비인간 등 다양한 현대 사회의 이슈들을 영리하게 다루고 있는 작가다. 그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2살 때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90년대부터는 영국에서 패션 스타일리스트로 일했다.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온 그는 30대 중반부터 미술 비전공자로서 예술계에 발을 들이며 또 다른 아웃사이더의 길을 자처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아니카 이는 생물학, 기술철학, 기후위기 등 다양한 주제를 예술로 묶어 자신만의 내러티브(Narrative)를 형성한다.
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아니카 이의 개인전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은 그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총 33점으로 10년 간의 작업 세계를 아우른다. 전시 서문에 따르면, 전시 제목은 불교 수행법 중 간화선(看話禪)에서 사용되는 화두(話頭)의 특성을 차용하여 아니카 이 작업의 명상적이고 영적인 전환을 반영한 것이다.2 이때 화두란 선종의 전문 용어로 공안(公案)이라 할 수 있는데, 공안은 여러 선사(禪師)3와 납자(衲子)4 사이의 문답을 공적인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아니카 이는 이런 공안을 사색을 위한 도구로 이해하고, 작품을 오랜 시간에 걸쳐 반추하고 그 안에 쌓인 의미를 해석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목을 붙였다고 밝혔다.5 이러한 불교적 제목은 서양권에 비해 불교적 개념에 익숙한 한국인들이 자아의 해체, 즉 무아(無我)에 대해 받아들이는 방식을 궁금해하는 작가의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6 아니카 이가 자신의 창작 원천 중 하나로 꼽는 개념은 ‘분인(Dividual)’ 개념으로, 사람을 개인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타인 또는 외부 세상과 관계를 맺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작가는 이 개념을 통해 인간은 생물학의 기본 ‘단위’가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물적, 비생물적 요소와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지구 생태계의 존속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7 결국 전시의 제목은 고정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우주론적 관점에서 생물의 실존적 문제에 집중하고자 했던 아니카 이의 작업을 아주 간결하고도 명확하게 정리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2024. © 아니카 이 사진제공: 리움미술관, 사진: 안드레아 로세티
아니카 이의 작업을 관통하는 것은 생물과 감각, 그리고 기술 간의 연계성이다. 그의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감각은 ‘후각’으로,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톡 쏘는 듯한 독특한 향이 난다. 일반적으로 전시장, 즉 화이트 큐브는 안전하고 권위적인 공간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한 공간에서 맡아본 적 없는 낯선 향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거부감과 불안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러한 불안감은 익숙했던(혹은 전통적인) 질서에서 무뎌졌던 감각들을 일깨워 새로운 감각을 기민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든다. 이번 전시의 메인 향은 조향사 바나베 피용(Barnabe Fillion)과 협업한 향으로 바다, 애니말릭, 플로럴, 감칠맛 노트로 구성되어 시트러스와 해조류, 비 온 뒤 나는 흙냄새, 가솔린 등 매우 복잡한 향을 풍긴다.8 작가는 이 향에 대해 생물화된 기계, 고대의 수생 생물, 원시 환경에 대한 상상을 담아 전혀 다른 세계를 연상시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9 결국 아니카 이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장은 바깥 세상과는 다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존재하는 일종의 멀티버스인 셈이다.
독특한 향을 뒤로 하고 전시장의 커튼을 젖히면 아크릴 판에 담긴 박테리아들과 튀긴 꽃, 고생대 생물체를 연상시키는 기계 조형물, 고치 안에서 윙윙거리는 기계 곤충 등 다양한 작품들과 조우하게 된다. 박테리아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생명체로, 인간과 꾸준히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온 존재이다. 살아있는 박테리아들은 아크릴 판이라는 인공적 환경 안에서 자연물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한다. 이는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두지 않고 생명체들의 삶을 보여주고자 하는 아니카 이의 의도가 전면에 드러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로 작가는 박테리아, 해조류와 같은 유기체를 지구 생태계의 시초로 이해하고, 그들의 생존 능력에 포커스를 맞춰 인간중심적 시간 개념에서 벗어나 전지구적인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니카 이, <또 다른 너>, 2024, 아크릴, LED, MDF, 거울, 양방향 거울, 박테리아, 아가 배지. 200 x 200 x 35 cm, 작가, 리움미술관 및 글래드스톤 갤러리
이런 작가의 의도를 가장 대표적으로 대변하는 작품이 바로 이번 전시의 신작인 <또 다른 너>(2024)다. 끝이 없는 우물처럼 아래로 반복되어 떨어지는 환영을 만들어내는 인피니티 미러(Infinity mirror) 형태의 작품 속에는 해양 유래 형광 단백질을 발현하도록 유전자가 조작된 대장균이 자라고 있다. 연한 녹색을 띄는 박테리아는 합성 생물학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진 인공적인 미생물이면서 해양 생물의 유전자를 가진 해양 생물의 친족이기도 하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고대 생명체인 해조류와 박테리아를 인간의 기술로 합성해 재탄생시킨 존재는 앞으로 전개될 생명체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읽어볼 수 있다.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2024. 사진: 좌은서
아니카 이는 박테리아와 같은 미생물의 유기 물질 분해 작용을 통해 생태계와 인간의 상호작용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패와 재생을 작업의 일부로 끌어들이고자 한다. 그 예시로는 2000년대 초기부터 이어져 온 <덴뿌라 프라이드 플라워 패널 Tempura Fried Flowers Panel>(2000년대~) 시리즈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꽃과 식물을 튀겨 보존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꽃은 본래의 향과 색을 잃게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튀겨진 꽃들은 점차 부패하는데, 이때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박테리아와 같은 미생물이다. 미생물의 성장과 분해 작용은 작품의 일부로서 부패가 단순한 소멸이 아닌 새로운 생명체의 발달 과정임을 보여준다. 하나의 작품 안에서 이뤄지는 변이와 성장, 죽음은 아니카 이의 주요 관심사였던 생명의 순환과 지속성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니카 이, <절단>, 2024, 폼, 석고, 페인트, 덴푸라 꽃 튀김, 유리, 튜브. 245 x 120 x 140 cm, 작가, 리움미술관 및 글래드스톤 갤러리 제공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인 <생물오손 조각 Biofouled>(2024) 연작은 <덴뿌라 프라이드 플라워 패널>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튀긴 꽃들로 따개비가 잔뜩 붙은 채 해상에 부유하는 잔해를 연상시키는 조각을 만드는데, 그 형상은 물에 잠긴 고체에 미생물이 붙어 자라며 형성되는 생물막을 뜻하는 생물오손과 의미가 통한다. 작품이 전시되는 동안 공기 중에 노출된 튀긴 꽃들은 자연스럽게 부패한다. 꽃들이 부패하며 풍기는 시큼한 향은 전시장을 꽉 채우는데, 관람객은 그 향을 맡으며 작품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유기적인 재료로 이루어진 작품의 변화 과정은 자연의 유한성과 라이프 사이클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이를 통해 아니카 이의 튀긴 꽃 연작들은 유기체인 꽃을 주 재료로 활용하고, 미생물을 협업자로 끌어들임으로써 자연의 복잡한 시스템과 지속 가능성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재현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2024. © 아니카 이 사진제공: 리움미술관, 사진: 안드레아 로세티
관람객들의 이목을 끄는 또 다른 작품은 전시장의 곳곳에 매달려 있는 해파리 혹은 플랑크톤을 연상시키는 기계들이다. <방산충>(2023) 시리즈는 5억년 전 고생대 캄브리아기에 처음 등장한 단세포에서 동물성 플랑크톤인 방산충류에서 영감을 얻었다. 실제로 15,000종이 넘는 방산충처럼 다양한 모습을 가진 기계들은 촉수를 접었다 펴며 마치 살아 숨쉬는 생명체처럼 부유하고 있다. 분명 인공물이지만 고대의 자연물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들은 ‘기계의 생물화’를 연구해 온 아니카 이의 관심사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계-생물화’ 작업 중 주목해볼 만한 또 다른 작품으로는 <켈프 조각 Kelp> 시리즈가 있다. 켈프(Kelp)는 바닷속 숲을 형성하는 해조류의 일종으로, 고대 인류가 유라시아 대륙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할 때 해조류 숲을 따라 이동했다는 켈프 하이웨이 학설(Kelp Highway Hypothesis)10을 반영한 작품이다. <켈프 조각>은 곤충의 고치처럼 생겼는데, 그 안에서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애니마트로닉스 나방(animatronic moths)은 기계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곤충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아니카 이가 꾸준히 기계를 생물화 시키는 이유는 기계와의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서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기계에 대한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으나, 인간은 여전히 기계를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작가는 이런 모순점에 주목하여 기계를 양립 가능한 방식, 즉 하나의 생물처럼 만들어 기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유대감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1
나아가, 아니카 이는 기계를 인간과 함께 살아갈 동반자로 인식한다. 이를 대표하는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공개한 신작인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 Each Branch of Coral Holds Up the Light of the Moon>(2024)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사후에도 작업이 계속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작품으로, 죽음 이후를 탐구하는 <공(公)>에 속하는 첫 번째 작품이다. 소프트웨어 ‘공(公)’은 10여 년간 아니카 이 스튜디오가 생산한 작업물을 데이터 삼아 훈련된 알고리즘으로 작가의 ‘디지털 쌍둥이’로 기능한다. 이번 작품은 공(公)이 시뮬레이션과 머신 러닝을 통해 아니카 이의 작업을 살아있는 가상 생물로 재해석한 것이다. 아니카 이는 공(公)이 3차원적 경험을 넘어 5차원에 해당하는 의식으로 이끌어주는 협업자로 인공지능(AI)을 소개하며,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여 살아가는 미래를 제시한다.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2024. © 아니카 이 사진제공: 리움미술관, 사진: 안드레아 로세티
인류는 기술의 발전을 통해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했다. 이런 인간중심적 사고방식과 행동은 지구 생태계의 균형을 깨트리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기후 변화나 생태계 파괴, 생물 다양성 감소 등이 그 ‘발전’의 부정적 여파다. 이때 아니카 이의 작품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데 의의가 있다. 그는 여러 생명체의 진화와 존재 방식을 탐구하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얽히고 설킨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진화해 왔음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속에서 인간은 생태계의 최고 포식자가 아닌 함께 공생하는 존재로 자리하게 된다.
아니카 이는 단순히 인간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외의 다양한 존재들의 감각으로 세계를 다시 인식하자고 제안한다. 미시적 세계에서 이뤄지는 상호작용을 통해 생태계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유기체들, 인간의 의도와 관계없이 스스로의 방식으로 환경에 반응하는 기계와 인공지능. 생태계의 모든 구성원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자신만의 생존 전략과 관계망을 형성해왔다.
결국 이 전시가 제시하는 바는 분명하다. 인간은 생태계의 일부이며 지구의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생태계의 다른 구성원들이 지닌 고유한 시각과 감각을 수용하는 태도에서 출발할 수 있다. 이 전시를 통해 우리는 기술 발전의 환상에서 벗어나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다. 생태계의 구성원이 지닌 삶의 형태와 취약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간은 전지구적 재난 상황을 타개하고 존속 가능한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다.
Writer 좌은서 (홍익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미술사를 전공하며 인류의 시작부터 포스트휴먼까지 시대를 자유롭게 넘나들어왔다. 그 중에서도 남들이 하지 않는 것, 남들이 보지 않는 것에 유달리 관심이 많다. 소수자, 동물, 식물, 환경 등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존재들에 초점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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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류세: 인류가 지구 기후와 생태계를 급격하게 변화시키며 자연적으로 생성된 지질연대와 구분하기 위해논의되고 있는 명칭이다.
2 https://www.leeumhoam.org/leeum/exhibition/79 (최종 접속 24.10.01)
3 선사: 선정(禪定)에 통달한 승려를 부르는 호칭
4 납자: 불교 선종(禪宗)에서 승려가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호칭 혹은 일반적 승려를 부르는 호칭
5 https://www.harpersbazaar.co.kr/article/1869636 (최종 접속 24.10.04)
6 무아(無我): 고정된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불교의 개념으로, 불교에서는 자아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7 아트인포스트, <아니카 이>, 『퍼블릭아트』, 2023.05, vol.200, pp. 48-89.
8 https://design.co.kr/article/33112 (최종 접속 24.10.04)
9 위와 같음
10 캘프 하이웨이 학설(Kelp Highway Hypothesis):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이 환태평양 해안과 베링 해협에 형성된 해조류 숲을 따라서 유라시아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했다는 학설, https://design.co.kr/article/33112 (최종 접속 24.10.08)
11 https://www.vogue.co.kr/2022/07/11/화학과-생물학으로-예술을-창조한-아니카-이/ (최종 접속 24.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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