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콜라 부리오, 〈판소리로부터 배우다〉(스틸), 2024, 촬영: 테크캡슐, 광주비엔날레재단 제공
제15회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 니콜라 부리오는 전시주제를 ‘판소리’로, 외부전시공간을 ‘양림동’ 전체로 알렸다. 그 선택은 소리를 향한 지속적인 관심에 기반했을 테지만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우연찮고 기이하게도 니콜라 부리오가 광주비엔날레를 준비하며 보여준 말과 글은 발견으로 가득했던 까닭이다. 비디오에세이 〈판소리로부터 배우다〉를 시작하며 부리오는 신대륙을 찾아낸 탐험가처럼 광주를 묘사한다. “이곳은 대한민국 광주. 정확한 좌표는 북위 35˚10’, 동경 126˚55’다.”1 지리적 좌표를 더욱 확대하여 외부전시공간을 위한 장소들을 탐색할 때에도 개척하는 정신이 근저를 이루는 듯하다. 그 자신이 주민 공동체를 통해 또다른 영감을 발견했기에, 부리오가 양림동 동네 한 곳을 외부전시공간으로 선택한 목적은 “사람들이 도시의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도록”2 하는 데 있다. 그 개척은 전시주제를 선정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유효했다. 이 프랑스인 예술감독은 “한국 문화의 토착적 요소로 (…) 판소리를 발견”3 했던 것이다.
니콜라 부리오는 “판소리는 서발턴의 오페라이자 노동계급의 목소리”로 규정한다. 실제 판소리가 어떠했는지/해왔는지와 논외로, 그가 정의 내리는 방식은 과거에 판소리를 “중세 때의 어릿광대, 음유시인 또는 트루바두르”4 에 비교했던 프랑스인 조상, 다블뤼 주교의 말과 다르지 않다. 외부전시공간을 광주 전역으로 분포시키지 않고 양림동에만 집중했을 때, 부리오 역시 이 동네의 역사를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 양림이 매력적이었던 지점은 광주에 서구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정착하여 근대 문물을 이식했다는 서사보다 마을 공동체가 일상 속에서 예술활동을 꾸려가는 에너지였을 따름이다. 그동안 부리오가 광주와 판소리를 ‘발견’의 방법으로 줄곧 말해왔던 까닭에, 양림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19세기 말 프랑스 선교사가 판소리를 보며 느낀 조선인의 자연스러움과 겹쳐진다. “조선 사람들은 말 그대로 즐겁게 노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그들의 놀이와 오락에는 무언가 단순하면서도 진솔한 것이 있다.”5

김영은, 〈오선보 이야기〉, 2022. 단채널 영상,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47분 8초. 작가 제공. 제15회 광주비엔날레 개작 커미션,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전시전경, 사진: 광주비엔날레재단 제공.
그렇기에 양림에 김영은의 〈오선보 이야기〉(2022)가 자리할 때, 전시장소와 작품을 명확히 분리한 채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양림에서는 열 명의 작가가 여덟 개 장소를 각자 점유하고 소리에 집중한 프로젝트들을 선보이는데, 절반은 신작이며 또 절반은 워크숍과 퍼포먼스 등 전시와 연계된 정기 혹은 비정기 이벤트를 함께 진행한다. 그 가운데 〈오선보 이야기〉는 송은에서의 개인전 출품작이었던 구작 중에서도 단채널 영상과 스테레오 사운드로 구성된 작업이다. 형식만 놓고 보면 다른 작품들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근대 서구 선교사들이 서구 문물을 이식한 동네에 동시대 프랑스인 예술감독이 비엔날레를 옮겨둘 때, “김영은의 작업은 한국 음악 표기법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데 그칠 수 없다. 이제 〈오선보 이야기〉는 세 달 동안 끊임없이 근대성이 심어둔 보편을 인지하게 하여,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를 고민하게 할 것이다. 비서구에 이식된 서구의 근대성 가운데서도 가장 보편적인 기준이 된 ‘오선보’의 이야기를 다룬 작업이 서울 중심지의 전시공간으로부터 광주비엔날레의 한편, 그것도 광주에서 최초로 서구를 옮겨둔 장소에 이식될 때, 중첩되는 옮겨짐들은 공명하여 더 크게 울려퍼진다.
발견되어 온 시간을 거슬러 발견하고 상상하는 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및 한희원미술관 전경.
니콜라 부리오가 ‘양림’을 발견하여 전시공간으로 선택한 현재에서 시간을 거슬러 보자. 양림의 시간은 발견과 이식으로 가득하다. 광주에 처음으로 선교사가 도착한 시기는 120년 전인 1904년이다. 선조들의 개척정신을 이어받은 것인지 선교사들은 읍성 외곽 양림에 터전을 잡는다. 그전까지 양림은 어린 아이나 부랑자의 시체를 매장하던 풍장터였던 민둥산을 중심으로 버려지다시피 했던 동네였다. 광주의 중심지였던 동명동과 충장로, 금남로에는 이미 일본인이 생활터전과 상권을 장악하던 때라 선교사들은 지리적으로 번화가와 인근했던 저렴한 땅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혹은 양림이 광주천을 기점으로 가난한 양민들이 모여살던 곳이었기에 보다 쉽게 선교 정신을 전파하기 위해서 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척박했던 땅을 발견한 뒤 선교사들은 고향의 호두나무와 피칸나무 같은 나무들은 물론 종교, 학교, 병원 등 근대식 문물들까지, 말 그대로 서구를 옮겨 심는다. 이후 도시 재개발과 아파트 증축으로 양림은 노후화된 장소로 남아있던 중, 문화사업가와 예술가에게 다시 발견되어 문화예술마을로 거듭난다.

김영은, 〈오선보 이야기〉, 2022,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전시전경.
이 과정에서 점차 발견되었던 사람들은 발견하는 사람으로 나아간다. 〈오선보 이야기〉가 전시되는 한희원미술관 역시 발견되어 새로운 정체성을 덧입힌 장소이다. 2015년 광주를 거점으로 작업활동을 하던 작가 한희원이 고향 동네 양림의 한 한옥을 사들여 미술관으로 개축했던 것이 한희원 미술관의 시작이었다. 1960년 혹은 1970년대에 지어진 주거공간을 그대로 미술관으로 활용하였기에, 완벽하게 직사각형을 이루지 않는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그렇다하더라도 한희원의 회화 작업이 벽에 딱 맞게 걸려 전시되었을 때에는 이러한 비대칭이 크게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단채널 영상 작업인 〈오선보 이야기〉가 투사될 때, 벽 사이의 대칭은 눈에 띄게 어긋나 왜곡된 화면을 만들어낸다.

김인식 편·조이순 열, 『조선구악 영산회상』, 1914, 조선정악전습소,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어쩌면 발견과 이식 사이에 벌어진 예기치 못한 외형적인 어긋남은 전통 국악을 서양 오선보로 옮길 때의 어긋남과도 닮았을지도 모른다. 김영은은 「조선구악 영산회상」을 발견한다. 이는 1914년 조선정악전습소 교사 김인식이 불교성악인 영산회상을 서양식 오선보로 역보한 것으로, 한국에서 처음 제작된 오선보로 알려져 왔다. 15세기 처음 기록되었을 당시 짧은 가사를 지닌 성악곡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기악곡과 모음곡 등 다양한 버전으로 이어지고 있기에 김인식이 원전으로 삼은 전통 악보를 정확히 가려낼 수는 없다. 〈오선보 이야기〉는 국악 연주자, 작곡가, 연구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산화랑 오선보와 전통악보, 그리고 실제 연주되는 음들 사이의 간극을 추적한다. 하지만, 작품은 「영산회상」의 원전을 찾아가는 시도는 아니다.
김영은은 보편이 되어버린 서구 악보에 온전히 기호화될 수 없는 전통음이 옮겨졌을 때의 균열을 짚어내며, 이 균열을 인식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한다. 보편이 주관하는 번역이 특수한 대상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할 때, 보편을 버리고 저마다의 특수한 과거를 거슬러 가서 답을 찾아야 할까? 그렇다면 혹은 그렇지않다면, 계속해서 번안을 반복하다 기록의 굴레에서 어긋나고 벗어난 소리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기록되지 못한, 어쩌면 기록할 필요가 없다 여겨져 흔적만 남은 과거를 기록된 사료 사이의 틈을 메꾸는 일은 역사가들의 오랜 과제였다. 하지만 역사학은 과학이기에 역사가들은 사료로 논증하지 못하는 틈새에 취약하다. 허구로 점철된 문학, 혹은 그에 준하는 상상력을 객관화되었다 여겨지는 기록과 결합하며, 일찍이 역사가인 나탈리 저먼 데이비스는 “그 시기, 그 장소의 다른 자료들을 통해 그들이 보였을지도 모를 반응들을 발견하기 위해 최선을”6 다한 뒤 애써 변명처럼 “과거의 목소리를 통해 엄격히 점검된 창안물”이라고 덧댄 바 있다. 그와 달리 예술에서는 철저하게 사료를 분석하고 논증 절차를 겪을 의무는 없다. 〈오선보 이야기〉 역시 원죄 없이 자유롭게 역사를 상상하며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양림에서의 〈오선보 이야기〉, “‘존재하는’ 미래”8 를 울리는 근대

김영은, 〈오선보 이야기〉, 2022,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전시전경.
〈오선보 이야기〉를 독해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남아시아 출신으로 영어로 글을 쓰는 역사가의 책을 이식한다. 인도 역사가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보편화된 유럽을 지방화하기를 시도하며 “인간 존재의 다양한 방식들에 관한, 그 무한한 통약 불가능성들에 관한 사유”를 실천하려 했다. “비유럽적인 정치적 근대성을 재현하는 데 유럽 정치 사상이 필요불가결함을 시종 인정하지만, 이러한 필요불가결함이 변함없이 창출하는 재현의 문제와 씨름”9 한다. 정치와 일상에 폭넓게 깔린 음악에도 차크라바르티의 논의는 유효하다. 오선보 역시 지방화 할 수 있는 유럽의 보편일 것이다. 서구는 몇 백 년 간 기명의 작곡가들이 악보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해왔다. 이렇게 악보로 역사를 쌓아온 서구는 근대성에 포섭되기 이전까지 오선보를 사용하지 않은 비서구, 이를테면 최소한의 기록으로만 음악을 이어온 조선의 이론적 주체로 굳어져 왔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특수가 보편의 장소를 찬탈했기 때문에, 그리고 찬탈했을 때 보편의 윤곽을 얼핏 엿보았다.”10 이 문장을 9년 전 처음 읽었을 때 이해하지 못했다. 〈오선보 이야기〉를 보고 나서야 이해했고 마음에 와닿았다. 김영은은 흘러가듯 과거의 어떤 특수의 시점과 현재의 또다른 특수의 시점을 병치한다. 4부 합창을 듣지 못하고, 다섯 개 음 밖에 가지지 못한 “음악적으로 능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반음이 생소하다는 것을 이해받을 때까지 기다리다 평균율의 음계에 익숙해지도록 교육받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약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의 음악적 관습을 이해하고 서구 음악의 토착화를 위해 노력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오선보는 변함 없는 기준이되어 조선인들의 일상에 파고들었다. 따라서 무궁한 애정과 이해가 서려있음에도 서구인들의 훈계는 찬탈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오직 오선보라는 특수만이 보편으로 공고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오선보가 모든 지역의 특수를 담아내지 못한다. 양금과 가야금의 울림이 교차하는 사이로, 정간보와 오선보가 대조된다. 〈오선보 이야기〉에서 서양음악을 먼저 배운 전통음악가는 청음 훈련에서 느낀 혼란을 들려준다. “악보가 없이 전승되는 음악을 교육하려다 보니까 가장 보편적으로 오선보에 곡을 적게 되고, 또 이게 배운 사람이 가장 빠르게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현재에 전통음악을 하는 이들에게 오선보는 항상 자명한 기준이 될 수 없어 혼란을 부추기더라도, 차크라바르티의 표현 그대로 “필요불가결하면서 동시에 부적합한”11 보편이 된다.
〈오선보 이야기〉의 마지막 발화는 오선보가 모든 음의 층위를 포괄하지 못하는 비서구 음악을 돌아보는 음악가의 목소리다. 음악가는 오선보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다. 그녀가 향하는 길 역시 회귀는 아니다. “오선보 기보 문제가 있기보다 정관보도 오선보와 별 다를 게 없는데 이것이 너무 신격화 되어있나 그런 생각도 들고요.” 끝내 추구해야 할 목표는 과거에 남은 기록을 넘어서 현재에 존재하는 행위자가 만들어갈 음악이다. “충분히 잘 활용할 수 있는데 활용을 잘 못하고 있는 상태로 교육받아왔던 게 문제구나 싶기도 합니다. 어쨋든 연주자의 역량이랑 의지가 적혀있는 그런 악보 보다 훨씬 중요하다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작품은 끝맺는 말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오선보 이야기〉의 결말은 가야금 연주가 주는 진동이다. 음표가 포섭할 수 없던 전통악기의 울림이 귓속을 파고든다. 소리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악보처럼,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영상은 흔들리고 겹쳐져 관람객은 온전히 소리에만 집중한다. 시각중심의 인식체계를 문제시하며 청각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이야기는 이제 진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한 이론들을 눈으로 따르지 않더라도, 악보가 다 담아내지 못하는 소리들이 귀 속에서 인식되는 순간 그 이야기의 유효성은 우리 안에 자리할 것이다.

김영은, 〈오선보 이야기〉, 2022,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전시전경.
“ 우리가 하나를 혹은 하나의 전체를 결코 구성하지 않는, 인간 귀속의 그 불가피하게 편린적인 역사들을 성찰할 때, 유럽의 정치적 근대성의 범주들에 대한 계보학들을 어떻게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이접적인 것들로 창안할 수 있는가.” 차크라바르티가 “아주 특수한 세계-내-존재방식들”을 “근대성의 보편적이고 추상적이고 유럽적 범주들 안에 기입해 넣으려고 했던”12 시도 끝에 던진 질문. 그에 답하기 위한 실마리들을 예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선보는 이미 너무나 보편적으로 자리잡아 세계 음악에서 사라질 수 없는 서사로 고정되었다. 그 가운데 김영은이 자아낸 〈오선보 이야기〉는 서구 근대성을 회피하지 않은 채, 이질적인 보편 안에서 “끊임없이, 불확실하게, 그러나 피할 수 없이” 우리의 자아를 되새기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 공존하는 세계를 찾아갈 이야기다.
Writer 배진선(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사)
역사를 공부했고, 미술로 노동해왔다. 노동하는 존재들이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시각적으로 표현되어온 방식을 탐구하며 자본의 질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예술의 힘을 믿는다. 종종 독립의 영역에서 기획과 출판을 하며, 역사가 형성되는 과정 아래 침묵 당한 존재들을 불러온다. 수원시립미술관, 백남준아트센터, 광주비엔날레를 거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시를 만드는 일을 한다.
‘태그(TAG)’는 신진 평론가를 발굴하기 위한 Thiscomesfrom의 비평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는 10주간 매주 금요일마다 새로운 비평가의 글을 소개하며, 릴레이로 진행됩니다. 각 참가자는 자신의 비평 글과 함께 다음 참가자를 지목(태그)하여 챌린지를 이어갑니다.
1 니콜라 부리오, 〈판소리로부터 배우다〉, 광주비엔날레재단. https://www.youtube.com/watch?v=Fq7i86A5rtU.
2 니콜라 부리오, 콜린 시위안 치너리와의 인터뷰, 「니콜라 부리오가 들려주는 광주비엔날레」, 『프리즈 위크(Frieze Week)』, 2024년 9월 6일, https://www.frieze.com/ko/article/frieze-seoul-2024-nicolas-bourriaud-interview-gwangju-biennale.
3 위의 글.
4 이유진, 「다블뤼 주교의 저술에 나타난 1860년 무렵 판소리의 모습」, 『판소리연구』 제32집(2011), 236.
5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제15회광주비엔날레 국문 도록(광주:광주비엔날레재단, 2024), 20.
6 탈리 저먼 데이비스, 『마르탱 게르의 귀환』,양희영 옮김(서울:지식의풍경, 2000), 18.
7 위의 책.
8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유럽을 지방화하기: 포스트식민 사상과 역사적 차이』, 김택현, 안준범옮김(서울:그린비, 2014), 492.
9 위의 책, 80.
10 위의 책, 18.
11 위의 책, 70.
12 위의 책, 500.
13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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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부리오, 〈판소리로부터 배우다〉(스틸), 2024, 촬영: 테크캡슐, 광주비엔날레재단 제공
제15회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 니콜라 부리오는 전시주제를 ‘판소리’로, 외부전시공간을 ‘양림동’ 전체로 알렸다. 그 선택은 소리를 향한 지속적인 관심에 기반했을 테지만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우연찮고 기이하게도 니콜라 부리오가 광주비엔날레를 준비하며 보여준 말과 글은 발견으로 가득했던 까닭이다. 비디오에세이 〈판소리로부터 배우다〉를 시작하며 부리오는 신대륙을 찾아낸 탐험가처럼 광주를 묘사한다. “이곳은 대한민국 광주. 정확한 좌표는 북위 35˚10’, 동경 126˚55’다.”1 지리적 좌표를 더욱 확대하여 외부전시공간을 위한 장소들을 탐색할 때에도 개척하는 정신이 근저를 이루는 듯하다. 그 자신이 주민 공동체를 통해 또다른 영감을 발견했기에, 부리오가 양림동 동네 한 곳을 외부전시공간으로 선택한 목적은 “사람들이 도시의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도록”2 하는 데 있다. 그 개척은 전시주제를 선정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유효했다. 이 프랑스인 예술감독은 “한국 문화의 토착적 요소로 (…) 판소리를 발견”3 했던 것이다.
니콜라 부리오는 “판소리는 서발턴의 오페라이자 노동계급의 목소리”로 규정한다. 실제 판소리가 어떠했는지/해왔는지와 논외로, 그가 정의 내리는 방식은 과거에 판소리를 “중세 때의 어릿광대, 음유시인 또는 트루바두르”4 에 비교했던 프랑스인 조상, 다블뤼 주교의 말과 다르지 않다. 외부전시공간을 광주 전역으로 분포시키지 않고 양림동에만 집중했을 때, 부리오 역시 이 동네의 역사를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 양림이 매력적이었던 지점은 광주에 서구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정착하여 근대 문물을 이식했다는 서사보다 마을 공동체가 일상 속에서 예술활동을 꾸려가는 에너지였을 따름이다. 그동안 부리오가 광주와 판소리를 ‘발견’의 방법으로 줄곧 말해왔던 까닭에, 양림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19세기 말 프랑스 선교사가 판소리를 보며 느낀 조선인의 자연스러움과 겹쳐진다. “조선 사람들은 말 그대로 즐겁게 노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그들의 놀이와 오락에는 무언가 단순하면서도 진솔한 것이 있다.”5
김영은, 〈오선보 이야기〉, 2022. 단채널 영상,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47분 8초. 작가 제공. 제15회 광주비엔날레 개작 커미션,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전시전경, 사진: 광주비엔날레재단 제공.
그렇기에 양림에 김영은의 〈오선보 이야기〉(2022)가 자리할 때, 전시장소와 작품을 명확히 분리한 채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양림에서는 열 명의 작가가 여덟 개 장소를 각자 점유하고 소리에 집중한 프로젝트들을 선보이는데, 절반은 신작이며 또 절반은 워크숍과 퍼포먼스 등 전시와 연계된 정기 혹은 비정기 이벤트를 함께 진행한다. 그 가운데 〈오선보 이야기〉는 송은에서의 개인전 출품작이었던 구작 중에서도 단채널 영상과 스테레오 사운드로 구성된 작업이다. 형식만 놓고 보면 다른 작품들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근대 서구 선교사들이 서구 문물을 이식한 동네에 동시대 프랑스인 예술감독이 비엔날레를 옮겨둘 때, “김영은의 작업은 한국 음악 표기법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데 그칠 수 없다. 이제 〈오선보 이야기〉는 세 달 동안 끊임없이 근대성이 심어둔 보편을 인지하게 하여,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를 고민하게 할 것이다. 비서구에 이식된 서구의 근대성 가운데서도 가장 보편적인 기준이 된 ‘오선보’의 이야기를 다룬 작업이 서울 중심지의 전시공간으로부터 광주비엔날레의 한편, 그것도 광주에서 최초로 서구를 옮겨둔 장소에 이식될 때, 중첩되는 옮겨짐들은 공명하여 더 크게 울려퍼진다.
발견되어 온 시간을 거슬러 발견하고 상상하는 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및 한희원미술관 전경.
니콜라 부리오가 ‘양림’을 발견하여 전시공간으로 선택한 현재에서 시간을 거슬러 보자. 양림의 시간은 발견과 이식으로 가득하다. 광주에 처음으로 선교사가 도착한 시기는 120년 전인 1904년이다. 선조들의 개척정신을 이어받은 것인지 선교사들은 읍성 외곽 양림에 터전을 잡는다. 그전까지 양림은 어린 아이나 부랑자의 시체를 매장하던 풍장터였던 민둥산을 중심으로 버려지다시피 했던 동네였다. 광주의 중심지였던 동명동과 충장로, 금남로에는 이미 일본인이 생활터전과 상권을 장악하던 때라 선교사들은 지리적으로 번화가와 인근했던 저렴한 땅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혹은 양림이 광주천을 기점으로 가난한 양민들이 모여살던 곳이었기에 보다 쉽게 선교 정신을 전파하기 위해서 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척박했던 땅을 발견한 뒤 선교사들은 고향의 호두나무와 피칸나무 같은 나무들은 물론 종교, 학교, 병원 등 근대식 문물들까지, 말 그대로 서구를 옮겨 심는다. 이후 도시 재개발과 아파트 증축으로 양림은 노후화된 장소로 남아있던 중, 문화사업가와 예술가에게 다시 발견되어 문화예술마을로 거듭난다.
김영은, 〈오선보 이야기〉, 2022,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전시전경.
이 과정에서 점차 발견되었던 사람들은 발견하는 사람으로 나아간다. 〈오선보 이야기〉가 전시되는 한희원미술관 역시 발견되어 새로운 정체성을 덧입힌 장소이다. 2015년 광주를 거점으로 작업활동을 하던 작가 한희원이 고향 동네 양림의 한 한옥을 사들여 미술관으로 개축했던 것이 한희원 미술관의 시작이었다. 1960년 혹은 1970년대에 지어진 주거공간을 그대로 미술관으로 활용하였기에, 완벽하게 직사각형을 이루지 않는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그렇다하더라도 한희원의 회화 작업이 벽에 딱 맞게 걸려 전시되었을 때에는 이러한 비대칭이 크게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단채널 영상 작업인 〈오선보 이야기〉가 투사될 때, 벽 사이의 대칭은 눈에 띄게 어긋나 왜곡된 화면을 만들어낸다.
김인식 편·조이순 열, 『조선구악 영산회상』, 1914, 조선정악전습소,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어쩌면 발견과 이식 사이에 벌어진 예기치 못한 외형적인 어긋남은 전통 국악을 서양 오선보로 옮길 때의 어긋남과도 닮았을지도 모른다. 김영은은 「조선구악 영산회상」을 발견한다. 이는 1914년 조선정악전습소 교사 김인식이 불교성악인 영산회상을 서양식 오선보로 역보한 것으로, 한국에서 처음 제작된 오선보로 알려져 왔다. 15세기 처음 기록되었을 당시 짧은 가사를 지닌 성악곡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기악곡과 모음곡 등 다양한 버전으로 이어지고 있기에 김인식이 원전으로 삼은 전통 악보를 정확히 가려낼 수는 없다. 〈오선보 이야기〉는 국악 연주자, 작곡가, 연구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산화랑 오선보와 전통악보, 그리고 실제 연주되는 음들 사이의 간극을 추적한다. 하지만, 작품은 「영산회상」의 원전을 찾아가는 시도는 아니다.
김영은은 보편이 되어버린 서구 악보에 온전히 기호화될 수 없는 전통음이 옮겨졌을 때의 균열을 짚어내며, 이 균열을 인식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한다. 보편이 주관하는 번역이 특수한 대상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할 때, 보편을 버리고 저마다의 특수한 과거를 거슬러 가서 답을 찾아야 할까? 그렇다면 혹은 그렇지않다면, 계속해서 번안을 반복하다 기록의 굴레에서 어긋나고 벗어난 소리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기록되지 못한, 어쩌면 기록할 필요가 없다 여겨져 흔적만 남은 과거를 기록된 사료 사이의 틈을 메꾸는 일은 역사가들의 오랜 과제였다. 하지만 역사학은 과학이기에 역사가들은 사료로 논증하지 못하는 틈새에 취약하다. 허구로 점철된 문학, 혹은 그에 준하는 상상력을 객관화되었다 여겨지는 기록과 결합하며, 일찍이 역사가인 나탈리 저먼 데이비스는 “그 시기, 그 장소의 다른 자료들을 통해 그들이 보였을지도 모를 반응들을 발견하기 위해 최선을”6 다한 뒤 애써 변명처럼 “과거의 목소리를 통해 엄격히 점검된 창안물”이라고 덧댄 바 있다. 그와 달리 예술에서는 철저하게 사료를 분석하고 논증 절차를 겪을 의무는 없다. 〈오선보 이야기〉 역시 원죄 없이 자유롭게 역사를 상상하며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양림에서의 〈오선보 이야기〉, “‘존재하는’ 미래”8 를 울리는 근대
김영은, 〈오선보 이야기〉, 2022,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전시전경.
〈오선보 이야기〉를 독해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남아시아 출신으로 영어로 글을 쓰는 역사가의 책을 이식한다. 인도 역사가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보편화된 유럽을 지방화하기를 시도하며 “인간 존재의 다양한 방식들에 관한, 그 무한한 통약 불가능성들에 관한 사유”를 실천하려 했다. “비유럽적인 정치적 근대성을 재현하는 데 유럽 정치 사상이 필요불가결함을 시종 인정하지만, 이러한 필요불가결함이 변함없이 창출하는 재현의 문제와 씨름”9 한다. 정치와 일상에 폭넓게 깔린 음악에도 차크라바르티의 논의는 유효하다. 오선보 역시 지방화 할 수 있는 유럽의 보편일 것이다. 서구는 몇 백 년 간 기명의 작곡가들이 악보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해왔다. 이렇게 악보로 역사를 쌓아온 서구는 근대성에 포섭되기 이전까지 오선보를 사용하지 않은 비서구, 이를테면 최소한의 기록으로만 음악을 이어온 조선의 이론적 주체로 굳어져 왔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특수가 보편의 장소를 찬탈했기 때문에, 그리고 찬탈했을 때 보편의 윤곽을 얼핏 엿보았다.”10 이 문장을 9년 전 처음 읽었을 때 이해하지 못했다. 〈오선보 이야기〉를 보고 나서야 이해했고 마음에 와닿았다. 김영은은 흘러가듯 과거의 어떤 특수의 시점과 현재의 또다른 특수의 시점을 병치한다. 4부 합창을 듣지 못하고, 다섯 개 음 밖에 가지지 못한 “음악적으로 능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반음이 생소하다는 것을 이해받을 때까지 기다리다 평균율의 음계에 익숙해지도록 교육받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약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의 음악적 관습을 이해하고 서구 음악의 토착화를 위해 노력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오선보는 변함 없는 기준이되어 조선인들의 일상에 파고들었다. 따라서 무궁한 애정과 이해가 서려있음에도 서구인들의 훈계는 찬탈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오직 오선보라는 특수만이 보편으로 공고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오선보가 모든 지역의 특수를 담아내지 못한다. 양금과 가야금의 울림이 교차하는 사이로, 정간보와 오선보가 대조된다. 〈오선보 이야기〉에서 서양음악을 먼저 배운 전통음악가는 청음 훈련에서 느낀 혼란을 들려준다. “악보가 없이 전승되는 음악을 교육하려다 보니까 가장 보편적으로 오선보에 곡을 적게 되고, 또 이게 배운 사람이 가장 빠르게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현재에 전통음악을 하는 이들에게 오선보는 항상 자명한 기준이 될 수 없어 혼란을 부추기더라도, 차크라바르티의 표현 그대로 “필요불가결하면서 동시에 부적합한”11 보편이 된다.
〈오선보 이야기〉의 마지막 발화는 오선보가 모든 음의 층위를 포괄하지 못하는 비서구 음악을 돌아보는 음악가의 목소리다. 음악가는 오선보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다. 그녀가 향하는 길 역시 회귀는 아니다. “오선보 기보 문제가 있기보다 정관보도 오선보와 별 다를 게 없는데 이것이 너무 신격화 되어있나 그런 생각도 들고요.” 끝내 추구해야 할 목표는 과거에 남은 기록을 넘어서 현재에 존재하는 행위자가 만들어갈 음악이다. “충분히 잘 활용할 수 있는데 활용을 잘 못하고 있는 상태로 교육받아왔던 게 문제구나 싶기도 합니다. 어쨋든 연주자의 역량이랑 의지가 적혀있는 그런 악보 보다 훨씬 중요하다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작품은 끝맺는 말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오선보 이야기〉의 결말은 가야금 연주가 주는 진동이다. 음표가 포섭할 수 없던 전통악기의 울림이 귓속을 파고든다. 소리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악보처럼,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영상은 흔들리고 겹쳐져 관람객은 온전히 소리에만 집중한다. 시각중심의 인식체계를 문제시하며 청각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이야기는 이제 진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한 이론들을 눈으로 따르지 않더라도, 악보가 다 담아내지 못하는 소리들이 귀 속에서 인식되는 순간 그 이야기의 유효성은 우리 안에 자리할 것이다.
김영은, 〈오선보 이야기〉, 2022,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전시전경.
“ 우리가 하나를 혹은 하나의 전체를 결코 구성하지 않는, 인간 귀속의 그 불가피하게 편린적인 역사들을 성찰할 때, 유럽의 정치적 근대성의 범주들에 대한 계보학들을 어떻게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이접적인 것들로 창안할 수 있는가.” 차크라바르티가 “아주 특수한 세계-내-존재방식들”을 “근대성의 보편적이고 추상적이고 유럽적 범주들 안에 기입해 넣으려고 했던”12 시도 끝에 던진 질문. 그에 답하기 위한 실마리들을 예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선보는 이미 너무나 보편적으로 자리잡아 세계 음악에서 사라질 수 없는 서사로 고정되었다. 그 가운데 김영은이 자아낸 〈오선보 이야기〉는 서구 근대성을 회피하지 않은 채, 이질적인 보편 안에서 “끊임없이, 불확실하게, 그러나 피할 수 없이” 우리의 자아를 되새기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 공존하는 세계를 찾아갈 이야기다.
Writer 배진선(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사)
역사를 공부했고, 미술로 노동해왔다. 노동하는 존재들이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시각적으로 표현되어온 방식을 탐구하며 자본의 질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예술의 힘을 믿는다. 종종 독립의 영역에서 기획과 출판을 하며, 역사가 형성되는 과정 아래 침묵 당한 존재들을 불러온다. 수원시립미술관, 백남준아트센터, 광주비엔날레를 거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시를 만드는 일을 한다.
‘태그(TAG)’는 신진 평론가를 발굴하기 위한 Thiscomesfrom의 비평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는 10주간 매주 금요일마다 새로운 비평가의 글을 소개하며, 릴레이로 진행됩니다. 각 참가자는 자신의 비평 글과 함께 다음 참가자를 지목(태그)하여 챌린지를 이어갑니다.
1 니콜라 부리오, 〈판소리로부터 배우다〉, 광주비엔날레재단. https://www.youtube.com/watch?v=Fq7i86A5rtU.
2 니콜라 부리오, 콜린 시위안 치너리와의 인터뷰, 「니콜라 부리오가 들려주는 광주비엔날레」, 『프리즈 위크(Frieze Week)』, 2024년 9월 6일, https://www.frieze.com/ko/article/frieze-seoul-2024-nicolas-bourriaud-interview-gwangju-biennale.
3 위의 글.
4 이유진, 「다블뤼 주교의 저술에 나타난 1860년 무렵 판소리의 모습」, 『판소리연구』 제32집(2011), 236.
5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제15회광주비엔날레 국문 도록(광주:광주비엔날레재단, 2024), 20.
6 탈리 저먼 데이비스, 『마르탱 게르의 귀환』,양희영 옮김(서울:지식의풍경, 2000), 18.
7 위의 책.
8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유럽을 지방화하기: 포스트식민 사상과 역사적 차이』, 김택현, 안준범옮김(서울:그린비, 2014), 492.
9 위의 책, 80.
10 위의 책, 18.
11 위의 책, 70.
12 위의 책, 500.
13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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